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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6/21,일-오전) "교회 기초 다지기(2) : 하나님" / 마 6:25~34 / 고한율목사



"교회 기초 다지기(2) : 하나님" / 마태복음 6장 25 ~ 34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40장, 304장, 588장, 5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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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문>

  오늘은 교회 기초 다지기 두 번째 설교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신앙의 가장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를 다진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난주 설교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 라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여러 종류의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청년들과 함께 네팔이라는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네팔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에베레스트 산이 있는 히말라야 산맥입니다. 8,000M가 넘는 산이 몇 개나 있습니다. 저는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얼마나 큰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네팔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팔이 신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네팔 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숫자가 무려 3억 3천만 개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이 있는지 모릅니다.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시내에 가면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신들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가장 인상 깊은 신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 가에 있는 작은 소쿠리 같은 것에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소쿠리 안에 무슨 신이 있나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 인간의 발 모양을 한 조각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발”을 신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무좀 환자들이 섬기는 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온갖 신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세상에 신들이 많을까요? 하나님이 이처럼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형 아론에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받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아론이 그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멸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제 1,2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 확인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친히 알려주셔서 그 내용을 기록한 책인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제임스 패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가장 유명한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여러분 여기 유리잔 안에 물이 있지 않습니까? 이 물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물이라는 것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것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물은 기온이 떨어지면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지면 수증기가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을 ‘물에 대해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물을 먹어보지 않고도 가질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물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 날 시원한 물을 마시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또 땀을 많이 흘려서 지쳤을 때,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면 정말 하늘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물을 실제로 마셔보거나, 물로 샤워를 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는 것을 ‘물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물에 대해 아는 지식과 물을 아는 지식의 차이를 아시겠어요? 물에 대해 아는 지식은 실제로 물을 마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지식입니다. 반면에 물을 아는 지식은 그것을 마시고, 체험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식이죠. 

 패커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나님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패커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만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없이,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이죠. 

 그 결과 교회마다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자신의 삶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당 안에만 계시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그 믿음은 항상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많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을 삶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그런 지식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4편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어떻게 알라고 말씀합니까? 맛보아 알라고 하십니다. 마치 입으로 먹어서 그 맛을 알듯이, 눈으로 직접 보아서 알듯이, 그렇게 여호와의 선하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무언가를 “안다”라고 할 때,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야다”라는 단어는 그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를 몸으로 체험하며 아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직접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그 맛을 보는 것처럼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온 몸으로 느끼듯이 생생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은곡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이처럼 생생하게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인물 중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 한 명이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입니다. 창세기는 에녹에 대해서 불과 4절 밖에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4절 속에 두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동행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예배당 안에서만 하나님과 함께 머문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느 곳에 있든지 늘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은곡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면 이것보다 더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생생하게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가 놀라운 신분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죄 가운데 마귀의 자녀로 살아왔는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저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자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심을 믿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입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힘쓰는 것이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다면 이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새가 이처럼 잘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새가 잘 살 수 있는 것은 새가 스스로 곡식을 심거나 거두어서가 아닙니다. 새에게 곡식 창고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새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가 잘 살 수 있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그 새를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새가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물며 너희는 이 새보다 더 귀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새도 이렇게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자녀인 너희를 굶기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예를 들어주십니다. 28~30절을 보세요.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이 이번에 예를 든 것은 들의 백합화입니다. 예수님은 백합화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솔로몬이 입었던 옷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합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이런 하찮은 들풀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영광스런 옷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셨다면 하물며 자녀인 너희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입히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분명히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정말로 안다면 이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그보다 훨씬 더 귀한 너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분명히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성경 안에서만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고, 성경 안에서만 병자들을 고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 신자들은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한숨 쉰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던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아무리 염려하고 근심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 몸 하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과학이 얼마나 발달하였습니까? 하지만 과학이 이처럼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의술이 그렇게 많이 발달했다고 말하지만, 메르스라는 전염병은 치료제조차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그리고 메르스를 정복하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제2의 메르스, 제3의 메르스가 계속 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교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들은 염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하찮은 새와 들풀도 귀히 여기셔서 그들로 복되게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굶게 하시고, 헐벗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여러분의 영혼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자의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세요. 하나님께 기도로 모든 사정을 말씀드린 후에는 기다리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복되게 하실 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제 삶을 되돌아 볼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항상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입니다. 그 때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이 학비였습니다. 300만원 가까운 학비를 6번이나 내야 했습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돈을 많이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첫 학기는 등록을 했는데, 다음 학기는 막막했습니다. 게다가 그 때 제가 사역하던 교회는 30~40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라 학비 지원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 학생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갔더니 대뜸 장학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액수가 아니라, 학비에 조금 모자라는 큰 액수였습니다. 게다가 한 번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나에게 장학금을 주느냐고 물으니까 그저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라고 말씀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5년 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였는데, 학비 걱정 안하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독일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다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 액수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때는 이미 사람들에게 독일에 간다고 다 말한 상황이라서 참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성도 한 분이 제게 후원을 하겠다고 하시면서, 매달 얼마씩 하려고 했는데, 처음에 비용이 많이 들테니 몇 년치를 먼저 주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독일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도 하나님이 나를 입히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올 때도 그랬습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일찍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왕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독일의 신학책을 많이 사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돈으로 모두 책을 샀습니다. 저희 가족이 한국에 올 때 통장 잔액이 72만원이었습니다. 완전히 거지가 되어 돌아온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가 돌아올 때가 2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역지도 얻기가 어려운 때였죠. 보통 연말에 사역지가 조정이 되거든요. 

 그런데 3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제가 은곡교회 오기 전까지 사역했던 송파제일교회에 부목사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면접을 보고 그 다음 날 부임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당시 담임목사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신속하게 사역지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개인에게는 이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먹이시는구나를 경험했던 때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하면서 저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게 염려나 근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계속 되다 보니 어느 때부터는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은곡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분명히 기억하세요. 그러므로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분들이 계십니까? 모든 것이 좌절이고, 절망처럼 느껴지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절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시편 84:5~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비록 눈물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그 안에서 많은 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른 비로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절망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곳이 은혜의 골짜기, 생명의 골짜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버림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굳게 믿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부모님의 하나님,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모시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늘 깨달으며,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생생하게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마태복음 6:25~34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3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3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3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40.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4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4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43.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