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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9/11,주일-오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고전 13장 1 ~ 3절 / 고한율목사

(09/11,주일-오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고전 13장 1 ~ 3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32 장, 218 장, 54 장 // 교독문 29번

160911_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한율목사.pdf



 고린도전서 12~14장은 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며, 교만하게 행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방언을 천사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뽐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 안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12~14장을 통해서 길게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살펴본 대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 문제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알려주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것으로,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교회를 섬긴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할 필요 없고, 주신 은사를 가지고 충성하면 됩니다. 


 이런 원칙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좋은지를 증명하는 표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은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성령의 은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12장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은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내용은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은사도, 지식도, 믿음도, 구제도, 희생도 모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 지식, 믿음, 구제, 희생은 기독교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중요한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치 신혼부부가 신방을 차릴 때 제일 좋은 TV, 제일 좋은 냉장고, 제일 좋은 오디오, 제일 좋은 세탁기, 뭐든지 제일 좋은 것으로 다 들여놓았는데, 그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전기가 안 들어오면 그렇게 좋은 TV, 냉장고, 세탁기는 어떻게 됩니까? 그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랑스러워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라도 사랑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1~3절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게 하는 예언의 능력을 받은 사람도 없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어려운 이웃에게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럴 생각조차 하는 사람도 우리 중에는 없고, 더욱이 우리 몸을 불사르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나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기 때문에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우리 상황에 맞추면 이런 식이 될 것입니다. “내가 새벽기도회를 10년 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40일 금식을 하고, 성경 100독을 하였으며, 장로, 권사, 안수집사로 세움을 받고, 성가대, 교사 등 안 해 본 봉사가 없을 정도로 봉사를 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조금 더 실감이 나지요?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 사랑이 없다면 다 쓸데없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극단적인 말씀 같지만,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사랑’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4: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면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으로 무엇이든지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신앙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성령의 은사를 받고, 믿음을 가지고, 구제하고 봉사를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마음이 있었던 신앙적 열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앙적으로 볼 때 훌륭했던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항상 야단치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누가복음 11:42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열심은 그들이 드린 십일조에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수입이 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적어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교회에 놀러 다녔습니다. 친구들 만나러 다닌 것이죠. 그런데 제가 참 신기했던 것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을 하는데, 당시 아이들은 대부분 100원을 헌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 10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어요. 그래서 어떨 때는 넣는 척하다가 도로 손에 넣어서 가지고 오락실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헌금을 도로 꺼냈던 아이도 목사로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제가 헌금을 하는데, 헌금통에 꼭 십원이 몇 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다들 100원은 헌금하는데 왜 십원이 들어 있을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들 중에 십일조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용돈으로 100원을 받으면 10원을 십일조로 꼭 드리는 것입니다. 대단한 아이들이죠. 


 지금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수입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십일조를 떼어서 드렸습니다. 대단한 열심이고,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런 열심을 칭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린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혹은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드리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셨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헌금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그 사람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비록 적은 액수의 헌금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과부의 사랑을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신앙생활은 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억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한 학생이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제가 그 어머니에게 “아이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부모님을 만날 때 흔히 하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했더니, 그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그것이 저의 큰 문제입니다”라고 말씀하더라고요.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시집을 오기 전에는 교회에 전혀 나간 적이 없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믿는 시댁,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신앙생활하는 집에 시집을 오게 돼서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에게 교회를 나오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데 무조건 교회에 가야한다고 하니 마음속에 반발만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보니 신앙에 대한 반발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에 그렇게 정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 시집왔을 때 자기를 삼년 쯤 내버려 두었으면 지금쯤 교회에 잘 다녔을 것 같다.” 


 믿는 것은 절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사랑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해 줄 것이고, 구원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영적인 죽음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죄로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방법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를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을 전혀 사랑할 수 없는 그 때에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릴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그리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가장 귀한 독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그 무엇도 아끼지 않고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위대한 힘을 우리는 이삭의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서 보게 됩니다. 형의 미움을 받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 친 야곱은 거기에서 외삼촌의 딸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라헬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라헬을 위하여 7년을 그 집에서 일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말이 7년이지, 아내를 얻기 위한 대가로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창세기 29: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였습니까? 칠년이라는 긴 세월을 단지 며칠 정도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약삭빠른 외삼촌이 라헬을 주는 대신 그 언니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외삼촌은 7년을 더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야곱은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라헬을 얻기 위해서 무려 14년을 보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군대 가도 1년이 안 되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고 하는데, 야곱은 무려 14년을 한 여자를 위해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사랑하면 그 어떤 희생도 기꺼이 치르게 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희생을 기꺼이 치르셨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신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때 “이 정도만 하면 되지”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한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에 어찌 제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생활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이 어찌 그 마음  속에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떻게 마음속에만 그 사랑을 담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말 속에, 우리가 하는 모든 사소한 행동 속에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믿게 하시거나, 억지로 헌신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베푼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으로, 그 사랑에 감동받도록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는데, 그래도 내 사랑을 받지 않겠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의무목록표가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읽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기를 바라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할 때 진정한 섬김이 나오고,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훌륭한 섬김과 봉사와 헌신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질문에, “네 저는 새벽기도회를 나옵니다.” “네 저는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네 저는 어려운 이웃을 항상 돌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는, 우리의 사랑 밖에는 대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생기게 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을 통하여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복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더욱 더 풍성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