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8,주일-오전) "한 몸과 다양한 지체" / 고전 12장 12 ~ 26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5 장, 29 장, 220 장, 53 장 // 교독문 2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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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클리브랜드 인디언스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은 한국의 추신수 선수가 한 때 있었던 팀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에 마이크 아빌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아드리아나와 마야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항상 아빠의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딸 중 하나인 아드리아나가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아빌스는 그 때부터 어린 딸 생각에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아빌스는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아빌스가 너무 부진하자 구단주와 면담을 하였는데, 이 때 아빌스는 자신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아빌스의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은 아빌스와 그의 딸 아드리아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2015년 5월 27일 아빌스가 소속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경기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 모든 관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삭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소속의 구단 관계자들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삭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백혈병에 걸려서 치료 중에 모든 머리가 다 빠진 아드리아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삭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응원하는 의미로 아드리아나를 위하는 팀이라는 뜻의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를 티셔츠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원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고, 8월에는 경기 전에 아빠와 함께 모든 관중들 앞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팀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하나 된 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를 또한 알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교회가 바로 이러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다양성이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어떤 차별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운 자든 그렇지 못한 자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이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모두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교회의 다양성이 무시당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미국에는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교회와 흑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교회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하여 학교와 직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까지도 서로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백인 교회, 흑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서로를 나누는 담도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야말로 그 어떤 차별 없이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다양성이 없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 있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핵심인 복음이 없는 교회이며, 그러므로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다양성만이 아니라,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의 모래처럼 같이 모여만 있을 뿐 서로 따로 따로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서로가 하나가 되려고 힘쓸 때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날처럼 교회 안이 냉랭한 때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성도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예배 한 번 드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다른 성도들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분명 교회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의 몸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마치 사람 몸과 같아서 다양한 지체가 있지만, 그것이 다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 또한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무엇도 그러하니라 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원래 그리스도 대신 어떤 말이 들어가야 잘 어울리겠습니까? 바로 교회라는 말이 들어가야 잘 어울립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교회도 그러하니라’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라는 말 대신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십니까? 교회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며, 믿음의 시작과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직접 들은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교회를 아주 열심히 그리고 잔인하게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만 핍박한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에 가서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 오늘날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에 있는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셨던 말씀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바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누구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5절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바울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이 핍박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보지도 못한 분을 핍박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자기를 소개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박해당하는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데, 성경은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무리가 곧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건물이나 특별한 장소를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이며, 동시에 성도들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즉 그 어떠한 사람들이라도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한 몸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구원자로 믿고, 또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나타내는 행사입니다. 그런데 장로교회에서는 세례를 행할 때 머리에 약간의 물을 뿌리는 것으로만 하지만, 실제로 세례의 의미를 더 잘 보여주는 방식은 침례라 할 수 있습니다. 침례는 물을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 몸을 물에 다 잠궈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침례가 성경적이고 세례는 침례를 간편하게 한 것으로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례나 침례나 초대교회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방식이기 때문에 어느 것으로 시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물속에 온 몸을 다 담구는 침례가 세례의 의미를 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속에 온 몸을 담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지금까지의 나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내 마음으로 살아왔던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다시 나옵니다. 이것은 나의 옛사람은 이제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것을 로마서 6: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인 우리들이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됨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라면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 또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도가 교회를 떠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들이 한국교회 안에 늘어나서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누구냐?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 나가’가 되지요. 교회를 나가지 않는 성도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정하여 나가지 않고, 마치 여러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하듯이, 교회를 돌아다니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만연한 부패와 죄악을 보면서 실망하여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도는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고,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인데, 결국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끊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교회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그런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키프리안이라는 목사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을 그 위대한 신학자인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 칼빈도 똑같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보다 교회의 중요성을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인 우리들에게 교회가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자신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갈라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가 나눠질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눠질 수 없고 하나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이 서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하는, 즉 통일성을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설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다양성과 통일성 모두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교회의 다양성에 대해서 먼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4~19절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재미있는 대화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사람의 발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어” 물론 사람의 발이 이렇게 말할 리는 없지요.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성도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쓴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교회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마치 발이 손을 보면서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손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하는 발이라고 해서 몸에 붙어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즉 몸에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가 ‘나는 눈처럼 보는 역할을 못하니까 난 필요없다’라고 말할 때, 귀가 필요 없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이나 눈의 역할을 발과 귀가 하지 못한다고 해서 발과 귀가 쓸모없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발과 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온 몸이 눈이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또 반대로 온 몸이 귀이면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 몸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들이 다 제각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은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를 부러워하면 안 되고, 귀는 보지 못한다고 해서 눈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각각의 역할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다르더라도 그 중요성은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자신을 부족하게 여겨 다른 성도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자신을 원망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교회의 각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눈과 같은 역할을, 어떤 사람은 손과 같은 역할을, 어떤 사람은 무릎과 같은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할을 주셨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면서 열등감이나 비교의식, 질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맡은 역할을 지금 충성스럽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성도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손이 자신의 기준으로 발을 보면 발을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숟가락도 못 쥐고, 글씨도 못 쓰고, 가려운 얼굴도 못 긁느냐, 손이 자신의 기준으로 발을 보면 이렇게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발의 역할은 손과 전혀 다릅니다. 손이 할 수 없는 일을 발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르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들이 있음을 알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몸의 다양한 지체를 둔 것처럼, 교회 안에 나와 다른 성도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성도들을 인정하고, 함께 협력하여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처럼 교회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20절부터는 교회의 통일성을 또한 강조합니다. 20절을 보세요.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이 말씀의 강조는 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것이 강조되었지만, 이제부터는 그 많은 지체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교회의 통일성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나보다 못하게 보이는 성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돈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괄시하는 것처럼 교회에도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교회처럼 비교적 역사가 오랜 교회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교회에 새신자가 왔을 때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오래 된 신자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교회를 오래 다닌 것만큼 복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많습니다. 30~40년 동안 한 교회를 다녔으니 얼마나 서로를 잘 알겠습니까? 서로 너무 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담이 되어서 새신자가 교회에 와도 그 안으로 도저히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신자가 와서 조금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다 하여 눈치받기가 쉽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새신자가 적응하지 못하고, 교회는 계속 고인 물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성도들을 더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절대 내가 더 낫다는 교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약한 성도를 교회에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24~25절을 보세요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몸에 있는 부족한 지체에게 하나님이 귀중함을 더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귀중함이 무엇입니까? 그 부족한 지체로 말미암아 온 몸의 지체가 서로 협력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다리가 병들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다리가 움직이지 못하니까 그 사람은 평생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픈 다리를 대신하여 온 몸의 지체들이 서로 협력하여 정상적인 활동을 하도록 힘쓰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연약한 다리로 말미암아 모든 지체들이 더욱 더 협력하고 서로 돌보게 되는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성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한 마음이 되고, 위해서 기도하며, 서로 돕고, 협력하게 됩니다. 훌륭한 교인만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형편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위하고 협력하는 교회야말로 참된 교회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같이 아프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든 성도가 다 똑같이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항상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은곡교회가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참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성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거나 원망하지 않고, 반대로 나보다 못한 성도를 보며 교만해 하지 않고, 오직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훌륭함을 칭찬하며 하나 되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다양한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어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은곡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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