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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8/14,주일-오후) "WCF (5)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 창 45장 4 ~ 8절 / 고한율목사

(08/14,주일-오후) "WCF (5)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 창 45장 4 ~ 8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42 장, 63 장

160814_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고한율목사.pdf


 지난 100년의 세계 역사 중에 가장 끔찍한 일 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아마도 세계 1,2차 대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세계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독일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정권은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포로수용소 중에 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독일은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성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끔찍한 죄악을 보여주는 포로수용소 같은 곳들을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하여서 후대들로 하여금 교훈을 삼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그 곳에 갔을 때도 독일의 어린 학생들이 그곳을 견학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우리나라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잘못을 반성 없이 변명만 하려는 일본과는 정말 비교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범한 범죄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그 범죄를 후대들이 반복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선진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포로수용소를 둘러보는데, 곳곳에 아주 큰 무덤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왕들이 묻힌 무덤같이 아주 큰 무덤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설명하는 글을 읽어보니까 한 무덤에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묻혀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기에 일일이 묻어줄 수 없어서 한꺼번에 매장을 한 것입니다. 


 건물 한 쪽에 TV가 있었는데 당시 상황을 찍어 둔 영상이 나왔습니다. 엄청난 시체가 쌓여있고, 독일 군사들이 큰 웅덩이를 파서는 시체들을 막 던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체를 던지는 사람들 옆에는 담배를 피면서 웃고 있는 독일 군인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인간인지 마귀인지 모를 정도로 끔찍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독일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떤 포로수용소 벽에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의 손톱으로 벽에 쓴 글씨 중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절망적인 마음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 속에 있게 될 때, 똑같이 질문합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인 세월호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이들은 가라앉는 배 안에서 똑같이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세요?” 

 우리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금 이런 상황일 될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렇게 학살당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수백 명의 꽃 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피해갈 수 없는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신학자들은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신정론은 하나님께서 선하고 공의로우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신정론은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이 신정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1항의 첫 문장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장차 될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는데, 이는 그의 뜻에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신 것이며, 자유로이 또는 변동 없이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장차 될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미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간의 계획과는 달리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 지금 되는 모든 일, 앞으로 될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우연은 전혀 없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세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계획하실 때,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제멋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대로 이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제가 언젠가 TV에 화가가 나와서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저 사람이 화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엉터리로 그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 저기 붓칠을 하는데, 도모지 무엇을 그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보았는데, 놀랍게도 점점 더 어떤 분명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화가가 마지막 붓칠을 하니까 정말 멋진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화가의 머릿속에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 자기가 그릴 사람의 얼굴 모양이 완벽하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제가 볼 때는 처음에 이상하게 그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실제로는 꼭 필요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없어도 될 텐 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들은 이 세상을 훨씬 더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한 뜻과 목적대로 이끄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고, 악한 일들도 벌어지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의 마지막을 알고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착한 주인공은 성공하고, 주인공을 괴롭혔던 악당은 망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면 드라마를 볼 때 염려하거나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악당이 착한 주인공을 막 괴롭히고 힘들게 하더라도,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악당은 망하고, 착한 주인공은 성공하게 됩니다. 이 결론을 알고 드라마를 보면 어떤 상황이든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실 때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너무 큰 염려와 걱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시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자유롭고, 또한 변동이 없는 것이라고 신앙고백서는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실 때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이고, 그렇기에 그 정하신 뜻은 결코 변동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 성도에게 큰 위로를 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고,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절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 변덕이 없는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야고보서 1:17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약속은 결코 변경되는 법이 없고,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자, 이렇게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셨는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셨고, 또한 자유로이 변동 없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그 계획이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되었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셨다면 악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주 심각한 질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것이 맞다면 악도, 사탄도, 죄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3장 1항의 하반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내시지는 않았으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셨고, 자연 법칙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성립시키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의로우셔서 그 어떤 악도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명백하게 말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악과 관련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피조물들의 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하면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모든 인류는 죄와 비참 가운데 살게 되었고 영원히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는 것을 막아주지 않았는가 불평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못 먹도록 막아주셨더라면 이 세상이 이처럼 불행해지지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불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로봇이 무엇입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셨다면 분명 죄는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봇을 통해서는 진정한 사랑도, 헌신도, 충성도, 감사도, 기쁨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나누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로봇이 아닌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와 진정한 사랑과 섬김, 기쁨,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과 죄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단지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악을 다스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악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중동에 있는 이란 사람들이 믿는 조로아스터교가 있습니다. 이 종교는 이 세상에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어서 서로 전쟁을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사탄이나 악, 죄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거나, 대등하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과 악, 죄는 하나님이 단지 허용하실 때까지만 활동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IS나 테러단체들을 보면서 그 악함에 우리가 경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악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악을 제거할 날이 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14절에 보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는 모든 악과 죄, 사탄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 결국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실 때, 그 악조차도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형제로서는 할 수 없는 악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고난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애굽 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였는데, 그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후에도 요셉의 고난은 계속 되었습니다. 함께 옥에 갇혀 있던 왕의 신하가 꿈을 꾸었고, 요셉이 그것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신하는 자기가 석방되면 요셉의 억울한 사정을 말해서 그를 풀어 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는 옥에서 나간 후로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감옥에서 오랜 시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계획 가운데 요셉은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 결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다스리고 있을 그 때에 요셉을 종으로 판 형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서 애굽을 방문하였습니다. 물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요셉과 그 형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입니까? 자신이 받은 고난을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정말 요셉을 볼 면목이 없지요.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요셉의 형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형들에게 이렇게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금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를 종으로 팔았다고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세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데, 바로 이 때를 위해 요셉을 먼저 보내셔서 그 가족을 구원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판 것은 죄를 지은 것이고 악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와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요셉이 나를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죄와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능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악한 일과 죄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너무 고통스럽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그런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요셉이 그러하였듯이 분명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분명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절망하며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오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신다는 것,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을 다스리시며, 결국은 그 악을 통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믿고 확신한다면 큰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결국 우리를 가장 복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삶을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