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주일-오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고전 12장 27 ~ 31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31 장, 197 장, 54 장 // 교독문 2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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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씁쓸하게 한 여러 사건,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한 식당에서 젊은 부부가 5살, 3살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1시간 정도 지나자 아빠가 먼저 일어서더니 식사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5분이 흐른 뒤에 엄마도 일어나 식당 밖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20분 정도가 흘렀습니다. 옆에 있던 손님들이 아이 둘만 남기고 부모가 안 보이자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식당주인은 부모가 화장실이나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간 줄 알고 다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부모는 볼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식당주인은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아이들을 데리고 파출소에 갔습니다. 그리고 수소문해서 부모를 알아냈고, 아이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이 엄마에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충격적이게도 아이 엄마는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전화 잘못 거셨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경찰이 아빠에게 이렇게 하면 아동 유기로 큰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자 그 때서야 파출소로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사실은 이처럼 부모가 자기들을 버리고 갔는데도 5살, 3살 아이들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없고, 매정한 어른들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하는 것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만이 아닙니다. 힘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차별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힘과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힘과 능력이 없는 노인과 아이들이 무시당하고, 학대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장관 인사청문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관후보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특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느 후보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데, 당시 일반적인 대출이자가 8%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보자의 경우는 1% 대출이자만 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후보자의 말대로 불법은 아니지만, 분명 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임은 분명한 것이죠. 우리는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이 세상이 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대우하는가를 똑똑히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관대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야박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너도 나도 힘과 능력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세상의 모습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힘과 능력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신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힘과 능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압제하고 짓밟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며,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가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1:6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다스릴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어떤 세상이 됩니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어린 아이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상상이 가십니까? 이것은 단지 짐승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세계만큼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구분이 강한 곳이 없지요. 약한 자는 무조건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철저한 양육강식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짐승의 세계일지라도 예수님이 다스릴 그 때가 되면 서로 사랑하며 함께 하는 세상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스리는 그 때가 되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능력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소망입니다. 비록 힘과 능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우리가 지금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들은 참으로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도하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온전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1:20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작고 초라한 겨자씨가 때가 되면 새들이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초라한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조차도 잘 못 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점점 더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진짜 사명이 무엇입니까? 큰 예배당을 짓는 것입니까? 예배당을 성도들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까? 모든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 모든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교회의 사명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옷 가게의 쇼 윈도우와 같습니다. 옷 가게를 가면 가게 바깥이 통 유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쇼 윈도우라고 부릅니다. 쇼 윈도우에는 마네킹들이 쭉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마네킹에는 그 가게에서 제일 좋은 옷들이 입혀져 있습니다. 우리는 가게 바깥에서 쇼 윈도우를 통하여 마네킹에게 입혀진 옷을 보고, 가게에 들어갈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쇼 윈도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하나님, 잘못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병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세속화가 무엇입니까? 세상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걸릴 수 있는 병중에 가장 치명적인 병이 세속화입니다. 즉 교회가 이 세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가장 치명적일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나,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나 다 똑같구나, 다를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교회가 똑같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없겠지요.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닮아가는 세속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을 때 교회의 생명은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힘과 능력이 최고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을 향하여, 강한 자든, 약한 자든 상관없이 모두가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가 오히려 사랑받고, 높임을 받는 그런 세상이 있음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한 어르신이 제게 하셨던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거의 80세가 되어서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오기 시작한 새신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제 손을 잡고는 “교회가 너무 좋아”라고 몇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좋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하는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나이 든 노인을 불편해 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교회는 전혀 반대라는 것입니다. 노인이라서 더 사랑해 주고, 노인이라서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안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고, 대우를 받으며, 강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겸손하게 봉사하고 섬기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교회라고 해서 유별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 똑같이 자기만 대우받기 좋아하는 죄인들이 모인 곳인데, 어떻게 세상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행동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나보다 더 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격려하며, 위할 수 있는 것은 나와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속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나보다 더 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이가 여름방학 때 수영장에 갔다가 발가락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마도 발가락 하나가 어디에 걸려서 뒤로 젖혀졌던 것 같습니다. 첫날에는 그저 괜찮겠지 했는데, 다음 날도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어린 아이의 발가락이라서 선명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도 어떤 상황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일주일을 기다려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을 대비하여 반기브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반기브스를 하고 집에 왔는데, 그 때부터 아이가 얼마나 조심하는지 모릅니다. 다치기 전에는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아이가 조금 조숙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친 발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가 보면 정말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일정도였습니다. 제가 아픈 부위 근처만 조금 만져도 금방 뼈라도 부러질 것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며칠 안 지나서 건강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구나. 우리 아이가 워낙 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발가락 다친 것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런데 저에게 한 번도 아픈 발가락 잘라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발가락이 제 기능을 못하니 바꿔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오히려 그 아픈 발가락을 얼마나 아끼는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 몸이잖아요.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길 마음이 어떻게 하면 생길 수 있을까요? 그 성도가 나와 같은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처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믿으면 어찌 그 성도가 연약하다고 해서, 부족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 몸인데, 어떻게 그 성도만 교회에 없으면 교회가 평안할 텐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불편한 발가락을 잘라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아끼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그리스도에 붙은 한 지체임을 믿을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사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은사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14장에서 분명하게 보겠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매우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천사의 말과 같이 매우 영적인 말로서, 방언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높였던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고,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여기에 보면 교회 안의 직분과 은사가 함께 섞여서 나옵니다. 이것은 직분과 은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의 직분은 이 세상에서 이해하는 어떤 자리의 개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봉사하지 않는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28절 말씀에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주신 분도, 은사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이 사실은 그 어떤 직분으로도, 그 어떤 은사로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직분을 세우고,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모든 직분과 은사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29~30절입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을 하는 자이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모든 직분과 은사가 똑같이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중요하다고 해서 모두가 사도이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있어서 아픈 성도를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모두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케스트라 공연 보셨지요? 직접 보고 들으면 얼마나 웅장한지 모릅니다. 수십 개의 악기들이 그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같은 곡을 연주할 때 얼마나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피아노만 50대를 놓고 공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그것도 독특한 음악이 되겠지만, 여러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단조롭고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피아노 독주가 아니라, 수십, 수백 개의 악기가 함께 협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악기가 다양하다고 해서 무질서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다양하지만 통일된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왜냐하면 지휘자가 완벽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휘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알맞은 직분과 은사를 주셨음을 믿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 없이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면 됩니다. 우리 각자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봉사할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음악을 세상 가운데 널리 울려 퍼지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나와 한 몸인 것을 기억하고, 또한 나와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만이 최고의 은사라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모든 은사와 직분이 다 똑같이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도 바울은 방언만을 최고로 여기는 성도들에게 그것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은사 중에도 더 크고 좋은 은사가 있구나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욱 큰 은사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 필요한 은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1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최고라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방언은 그 유익이 교회에 있지 않고 개인에게 있는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전하는 일이므로, 교회 전체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즉 더 큰 은사란 교회에 더 유익이 되는 은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면서 12장을 마칩니다. 이것은 이제 13장에서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겠다는 뜻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너무나 유명하지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은사를 받고, 직분을 받아 봉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이 없는 직분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이 최고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이 세상을 향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은곡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보여주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한 몸이라는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주신 은사와 직분을 통해 사랑으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거기에 함께 참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역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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