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4,주일-오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라" / 고전 7장 17 ~ 24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5 장, 419 장, 459 장, 620장 3절 // 교독문 12번
160424_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라-고한율목사.pdf
어느 목사님 설교집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목사님이 이번에 대학을 입학하게 된 청년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정색을 하면서 “아니에요. 목사님. 저 멀리 지방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걸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목사님이 수도권 안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청년에게 가서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도 똑같이 정색하면서 “아니에요 목사님. 서울대도 못 들어갔는데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울대에 들어간 청년에게 가서 “넌 진짜 기쁘겠구나. 축하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도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서울대면 뭐해요. 과가 좋지 못한데”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서울대에서 가장 좋은 과에 입학한 청년에게 가서 말했다고 합니다. “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우리나라 최고 좋은 대학, 최고 좋은 학과에 들어갔으니. 행복하지?” 그러자 그 청년도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한국에서만 최고면 뭐해요.”
조금 극단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걸려 있는 문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비교의식입니다. 그런데 비교의식은 학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글에 한국 사람들은 평생 화장실 개수 늘리다가 죽는다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한국 사람들은 계속해서 집을 넓혀가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데, 집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화장실 개수가 늘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화장실 한 개 있는 집에 살다가, 두 개 있는 집에 살고, 나중에 세 개, 네 개 있는 집에 산다는 것이죠. 이것을 성공과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화장실 개수를 늘리다가 죽는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는 화장실이 몇 개입니까? 과연 화장실이 많아지니까 그만큼 행복하던가요? 대학이나 아파트, 자동차, 회사의 직급, 연봉, 자녀들의 학업, 이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내가 조금 더 나으면 행복해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해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걸려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비교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더 낫고, 높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교의식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비교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읽은 성경본문의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교의식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각각의 살아야 할 이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부르심을 주지 않고, 각각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각각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은사를 각각 주셨습니다. 이처럼 각각 부르시고, 각각의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농구선수는 야구선수가 만루홈런을 쳤다고 해서 배 아파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는 일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비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똑같이 부르지 않고 각각 불러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비슷비슷하게 보일 때도 있기는 합니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처음 보면 구별을 할 수가 없을 만큼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손가락에 있는 지문을 찍어보면 세상에 사는 70억의 사람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문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도 모두 각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와 비교해서 불행을 느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길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길에 내가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것이지, 내 옆길을 가는 사람이 나보다 앞섰느냐 뒤에 있느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도 비교의식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18~19절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성도가 된 이상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유대인은 이방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너희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믿은 모태신앙인이든 나중에 예수 믿게 된 사람이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너희가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입니다.
제가 만났던 성도님들 가운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모태신앙이 아닌 것에 대해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태신앙이 아니라서 신앙이 늘 변덕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냐며 부러워하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론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정말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엄마 뱃속에서 믿기 시작한 사람이나, 나중에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사람이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므로 자신이 모태신앙인이라고 자랑하면서 지금은 대충대충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인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이 그렇지 못한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각각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대인으로 부르심을 입어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방인으로 부르심을 입어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모태신앙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더 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부르심 가운데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지고 서로 비교해서는 안 되고, 내게 주신 부르심에 지금 충실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을 3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이처럼 세 번 물으신 것은 세 번 배반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죽음을 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른 제자 하나를 보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21:21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듣자마자, 다른 한 제자를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항상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궁금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사람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신경 꺼”입니다. 다른 사람의 길을 궁금해 하지 말고, 네 자신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단의 한 목사님이 이 말씀에 큰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10년 정도 전인데, 그 교회의 올해 표어를 이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너나 잘해” 실제 일 년 동안 이것을 교회표어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성도를 쳐다볼 필요 없이 우리에게 주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옆에 있는 성도를 높이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낮추어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우쭐대거나 동정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 각자의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가장 알맞고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을 충실하게, 묵묵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복되게 사는 방식입니다.
요즘 청년들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들어보셨지요? 지난 총선 때 어떤 당의 선전물을 보니까 자신들의 당을 흙수저당이라고 소개를 해 놓았습니다. 흙수저들을 위하는 당이라는 것이죠. 금수저와 흙수저는 어떤 부모로부터 태어났느냐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돈 많고, 힘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 금수저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돈 없고, 힘 없는 부모 밑에 태어난 사람을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 흙수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유는 청년들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하고 애를 써도, 소위 말하는 ‘빽’이 없으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때문입니다. 개인의 능력보다 출신 배경이 더 중요한 오늘의 현실을 꼬집는 말입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를 포함한 몇 명의 훈련병을 따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백여 명 되는 훈련병들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르고 서 있는 앞에 있던 한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너는 빽이 뭐냐?”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가만히 있으니까 “난 아는 사람이 대령인데, 내 앞에 있는 녀석은 아버지가 별 두 개래. 넌 아버지가 뭐냐?” 그래서 “내 아버지는 육군 병장인데”라고 대답했습니다. 황당한 얼굴 표정을 짓더니 저를 더 이상 안 쳐다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불려간 자리가 어떤 부대의 면접을 하는 곳이었는데, 소위 말해 힘쓰는 자제들이 가는 그런 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들 빽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봤던 것이죠. 아버지가 육군 병장이라니까 더 볼 것도 없구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친구들은 다 떨어지고 저는 붙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보다 더 큰 빽은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금수저, 흙수저를 말하면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따라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합니다. 21~22절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이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종과 자유인입니다. 오늘 시대에는 종이나 노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과 자유인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유인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지만, 종은 주인에게 매여 살아야 했습니다. 종들은 많은 경우 마치 주인의 도구처럼 취급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질 때 자유인과 종이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자유인과 종이 서로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위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언했던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세상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종과 자유인 사이에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거대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장벽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모두에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회적 장벽, 인종적 장벽, 성적인 장벽, 경제적 장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사람들이라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예수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종과 자유자들에게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종과 자유자를 단순하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종은 극단적인 흙수저이고, 자유자는 극단적인 금수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21~22절을 읽을 때, 종 대신 흙수저라고 읽고, 자유자 대신 금수저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그렇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흙수저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흙수저라도 주께 속한 금수저이요 또 그와 같이 금수저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흙수저이니라” 어떻습니까?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흙수저라고 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는 주께 속한 금수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우리를 흙수저로 보면서 무시하고, 하찮게 대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금수저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금수저로 본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는 우리가 흙수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네가 아무리 흙수저라도 하나님은 너를 금수저로 보시니까 무조건 참고 살아라. 이 세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신경쓰느냐?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면 다 해결되니까 그저 참고 살아라”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을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절대로 불합리한 이 세상에 대해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종과 자유인, 그리고 흙수저와 금수저로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참으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볼 때 이 세상이 보는 식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방식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재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우리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우리 스스로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합니까? 돈이 얼마나 많나? 집이 얼마나 큰가?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가? 부모가 얼마나 대단한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아무 생각없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스스로 사람들의 종이 되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 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들은 이제 우리 삶을 평가하는 기준도 새로워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충실했는가를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지,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인기를 가졌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에 충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왔다면, 그 사람이 종이건, 자유자이건, 흙수저이건, 금수저이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23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의 생명 값으로 산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릴 위해 내놓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귀한 존재입니다. 자유자가 아니라 종이라고 실망스럽습니까?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라서 절망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 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덧붙여서 우리의 몸값을 높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얼마나 귀한지, 행복한지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값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사신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더 이상 종이냐 자유자냐, 흙수저냐 금수저냐 싸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런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곁눈질하고 비교하면서 스스로 우쭐해 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삶, 우리에게 주신 가정, 우리에게 주신 일터, 우리에게 주신 교회, 바로 여기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다른 곳들을 곁눈질 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에 충성하는 데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주신 부르심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주시며,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항상 충성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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