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7,주일-오훈) "사사기 강해(8) 큰 용사 기드온" / 삿 6장 11 ~ 18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57 장, 545 장
160417_큰 용사 기드온-고한율목사.pdf
우리는 지난주에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철병거 900대를 가진 무시무시한 시스라의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여자인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한 여인과 철병거 900대는 절대로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드보라와 또 헤벨의 아내인 야엘을 통해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두 여인을 통해서 당시 최고의 부대를 격파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기에서 계속 강조되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이스라엘의 승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아무리 강력한 적군이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물리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들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싸움은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여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게 되는 것이 신앙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섬기는 우상을 아주 열심히 섬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을 받아서 응답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열심만 있다고 해서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신앙생활이란 무엇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열정을 가지고 그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길을 갈 때 무조건 열심히 뛴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길을 잘 못 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모르고 열심히 뛴다면 점점 더 목적지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채 무턱대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점점 더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거기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백성들을 기뻐하사 반드시 형통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으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 내가 잘 사는 것에만 신경 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음에도, 사사가 죽으면 다시 우상에게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우상 숭배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상이 지금의 삶에 복을 준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 셋 다 번영과 관련된 우상들이었습니다. 바알은 풍년을 들게 하는 신이었고, 아세라와 아스다롯은 자녀를 많이 낳게 해 주는 신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를 잘 짓는 것과 자녀를 많이 낳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보다 지금 당장 우리를 복되게 하는 우상들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사가 죽으면 곧바로 우상에게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도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여기 기도온의 말을 잘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 드보라를 통해서 40년 간 평온한 삶을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에 또 다시 악을 행하였습니다. 우상숭배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미디안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벌하셨습니다. 미디안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을 아주 잔인하게 지배하였습니다.
특별히 미디안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모든 식량들을 바닥내었습니다. 마치 메뚜기 떼가 날아와 모든 곡식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듯이,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와 모든 식량을 다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또 사사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므낫세 지파 사람 기드온을 사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사사로 세울 때, 기드온이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말은 당시 백성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말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과연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 따지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함께 하신다면 도저히 이럴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형편이 이처럼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말을 뒤집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왜 우상숭배를 하는지 아십니까? 우상들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한다고 말만 하지 실제로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아주 도발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기도온의 말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처한 지금의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이렇게 어려울 리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세상과 타협해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 잘 짓게 해 주는 바알에게 가는 것처럼, 아이를 잘 낳게 해 주는 아세라에게 가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당장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기드온의 말이 오늘 우리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드온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울 때는 다른 사사를 세울 때와 다른 사건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백성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보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바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지자를 먼저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를 먼저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고통스런 현실 가운데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만, 선지자는 너희가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이유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얼마나 쉽게 결론을 내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살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59: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못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멀어지게 되었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듣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복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쫓아갈 때 복은 우리에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마태복음 6: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글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먼저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을 먼저 구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핑계로 믿음을 타협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이 있지 않나를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복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한 말씀입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기드온이 대단한 군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바로 앞 절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까? 밀을 타작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밀을 타작하였습니까? 타작마당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성 밖에 있는 아주 넓은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어디에서 했습니까? 포도주 틀입니다.
포도주 틀은 땅을 파서 만든 것으로 그 크기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보이는대로 모든 식량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타작마당에서 밀을 타작하면 분명 미디안 사람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볼 수 없는 포도주 틀 안에 들어가서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사람들 몰래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데, 누가 나타난 것입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숨어서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큰 용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색한 일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밀을 타작했다면 큰 용사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지금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사자는 그런 기드온을 보고 큰 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드온으로서는 매우 창피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정말 큰 용사라고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비겁하고, 의심이 많은 그런 사람인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12절에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씀은 더 정확한 순서로 이야기하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가 맞습니다. 즉 하나님은 기드온이 진짜 큰 용사라서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사람,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거룩한 무리가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기는커녕 여전히 죄에 쉽게 넘어지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라도 거룩한 사람, 성도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 오전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펴보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은 고린도 교회 성도만큼 문제 많은 성도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다 갖고 있었던 것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약하고 경건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도 바울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2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죄가 많은데도, 문제가 많은데도 성도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소심하고 비겁한 기드온을 큰 용사로 만드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고, 여전히 죄를 쫓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은 성도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 은혜가 우리를 성도로 만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너무 실망하지 말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답게 만드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성도로 결국은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킬 줄로 믿고, 매일의 삶 가운데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을 더욱 더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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