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5,주일-오전) "영적 가지치기" / 고전 7장 32 ~ 40절 / 고한율목사
(05/15,주일-오전) "영적 가지치기" / 고전 7장 32 ~ 40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191 장, 321 장, 171장 1절 // 교독문 14번
160515_영적 가지치기-고한율목사.pdf
지난주에 남서울노회 여전도회 야외예배가 보라매 공원에서 있었습니다. 저도 여전도회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갔습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하여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땅 바닥에 보니 초록색의 작은 공 같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매실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매실 열매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가지에는 거의 안 붙어 있고, 땅 바닥에 거의 다 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공원에 있는 나무다 보니까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조금 찾아보니까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매실 나무도 가지치기가 참 중요하다고 합니다. 매실나무는 일 년에 두 번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데, 가지치기를 잘 못하면 그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가지치기를 잘 해야지 크고 좋은 매실을 많이 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보라매 공원에서 본 것처럼 익기도 전에 땅에 다 떨어져 쓸모없게 되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해 주지 않으면 처음에 아무리 많은 열매가 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글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꼭 해 주어야 합니다. 병든 가지, 죽은 가지, 다른 가지들을 방해하는 가지 등을 제거해야지 품질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품질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좋지 않은 가지들을 꼭 잘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무엇이든 바쁘게 많은 일들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주하게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에 가지들은 너무 많은데, 실제로 달려 있는 열매는 적은 것입니다. 열매가 있더라도 다 익기 전에 땅에 떨어져 아무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바쁘게 여러 많은 일들에 분주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종의 영적 가지치기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가지치기한 나무가 건강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 또한 신앙생활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 말씀을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보고 있는데, 신자의 결혼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결혼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 중에는 꼭 결혼만이 아니라, 성도의 삶 전체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영적인 가지치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하여” 여기에는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 성도와 장가를 간 남자 성도를 비교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 성도는 무엇을 염려합니까? 주님의 일을 염려하고,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염려합니다. 반면에 장가를 간 남자 성도는 무엇을 염려합니까? 세상 일을 염려하고,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를 염려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 성도가 세상의 일을 염려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일이라는 의미로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염려를 전혀 하지 않으려면 얼른 천국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만 신경 써도 삶이 만만치가 않은데, 거기다가 세상의 일들과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면 우리가 너무 힘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남자 성도만이 아닙니다. 여자 성도들도 똑같습니다.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남자 성도와 마찬가지로 여자 성도들도 시집을 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 성도는 무엇을 염려합니까? 주님의 일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고 힘씁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시집을 간 여자 성도는 어떻습니까? 세상일을 염려하고 어떻게 해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만을 섬기기에도 벅찬 데 이런 것들까지 염려한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사도 바울은 결혼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주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결코 아닙니다. 35절을 보세요.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다만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즉 너희로 하여금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바울의 초점은 결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우리가 어떤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즉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무엇보다 주님의 일에 힘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방해하고 어렵게 하는 일이 있다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권면을 성경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집을 방문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예수님께서 심방을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니인 마르다는 귀한 손님인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청소하랴, 차 대접하랴, 과일 깎으랴, 식사 준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인 마르다는 이처럼 할 일이 많아서 그 마음이 분주한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셔 놓고는 그 앞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가 뻔히 바쁜 것을 보면서도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서 이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또한 마리아가 너무 했다고 생각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편하게 앉아 있는 마리아보다 혼자 고생하는 마르다 편을 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예수님은 마르다가 이처럼 분주하게 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한 일도 참 귀합니다. 우리 주님을 섬기기 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르다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더 좋은 선택을 했어야 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죠. 마르다는 분명 마리아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여러 일들을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은 사람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였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더 좋은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을 심방하면서 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방을 가면 심방을 받는 성도님들이 얼마나 분주한지 모릅니다. 심방 오기 전까지 집을 깔끔하게 청소합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사는 것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를 들어보니까 믿지 않는 남편도 심방을 자주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고 해요. 왜냐하면 집이 깨끗해지니까요.
아무튼 집 청소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식사를 겸하는 심방이면 더 할 일이 많습니다. 좋은 것을 대접하려고 정말 많은 준비를 하세요.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뭐냐 하면 이야기를 나누고 예배를 드릴 때 음식 생각하느라고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 받는 중에 계속 부엌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심방을 하는 저도 함께 정신이 없습니다. 심방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요. 심방은 집이 얼마나 깨끗한지, 음식은 얼마나 잘하는지 그거 알아보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의 형편을 묻고, 신앙을 점검하며, 기도제목을 받아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을 말씀을 통해서 함께 확인하는 시간이 심방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대충하고, 깨끗한 집과 맛있는 음식만 기억에 남는 심방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심방을 받을 때 집 청소나 음식 준비에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대신 가정의 형편과 기도제목을 잘 준비해서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예배드리자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사실 이렇게 설교한다고 해도 막상 심방 가면 여전히 집 청소하고 음식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고 얼마 지나서 한 집을 심방했습니다. 어머니와 딸이 심방을 받았는데, 뭔가 달랐습니다. 딱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들의 신앙생활과 기도제목을 잘 준비해서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다른 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예배에만 집중하였습니다. 부엌을 오가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심방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식사준비를 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나서 간단하게 차린 식사를 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하시는 말이 제 설교를 듣고 느낀 점이 많았다고 하면서, 심방을 제대로 받아보자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방 중에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도록 마음먹었다는 거예요. 저에게는 참 감동적인 심방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집을 깨끗하게 하는 것, 밥을 맛있게 준비하는 것, 모두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면 더 중요하고 더 귀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리아가 바로 이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보다는 마르다처럼 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 많은 일들로 말미암아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상의 여러 일들에 매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영적인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치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우리의 삶 가운데 건강하고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를 살펴보았는데, 잎만 무성하지 열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정작 열매는 하나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무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잎만 무성하고 정작 열매는 전혀 없는 무화과나무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도 잘 드리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여러 많은 사업도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믿음은 없었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그런 나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면서 신앙의 열매 없이 그저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는 신앙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잎이 많고 가지가 많다고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좋은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가지들, 병든 가지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것을 방해하는 세상적인 일들을 가지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고 쫓아가는 것들을 우리 또한 똑같이 사랑하고 쫓아간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해 분명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재물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혼합주의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혼합주의적 신앙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대표적인 잘못된 신앙형태였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고 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잘 드리지 않았거나, 혹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만 섬겼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안식일을 잘 지켰고, 예배를 잘 드렸고, 종교적인 의무들을 잘 수행했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도 함께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상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풍년을 준다고 약속하는 바알을 함께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아이를 많이 낳기 위해서 다산의 신인 아세라를 함께 예배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것을 혼합주의적인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혼합주의 신앙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내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런 혼합주의적 신앙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똑같이 돈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권력과 명예를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내 자식을 섬깁니다. 성경에서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권력과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자식만을 최고로 여긴다면 이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귀한 것이 있다면 영적인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당한 것처럼 우리 또한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치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인 줄 알고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분명히 확인하듯이, 그 우상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약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분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즉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성도라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참된 성도들에게 주님을 위한 일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치기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지치기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계속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혹 우리는 불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너무 좋아서 너무 귀해서 붙잡고 있는 세상의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가장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치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수록, 더욱 기쁘게 할수록 우리의 삶도 더욱 풍성하고 복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여러 분주한 일들을 잘 돌아보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은혜를 받아 이 땅을 참으로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