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6,수) 왕하강해(1)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 / 열왕기하 1:1-8 / 고한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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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 본문 : 왕하 1장 1 ~ 8절 | 2017년 8월 16일 |
왕하 강해(1)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 |
찬송가 : 433 장, 322 장
오늘부터 열왕기하 말씀을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오랫동안 살펴보았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죽고 난 후 그를 이어 왕이 되었던 아하시야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합 왕은 천하의 악당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북이스라엘을 바알 신앙으로 물들였던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주신 권력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아합 왕의 아들로 이제 왕이 된 아하시야는 과연 어떤 왕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그 또한 아버지에 버금가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2:51~53절에 보면 아하시야가 어떤 왕이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바암의 길로 행하며 53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왕노릇을 한 것은 불과 2년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합이 22년을 왕노릇했는데, 그에 비해면 불과 1/10 정도 밖에 왕으로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2년 동안 아하사야가 범한 죄는 그의 아버지가 범한 죄와 비교할 때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들이 계속해서 범했던 우상숭배의 죄를 똑같이 범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아하시야가 바알 숭배에 힘썼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알숭배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아합과 이세벨이 가장 힘썼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바알 숭배에 힘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신앙에 힘쓴 것은 사실이지만, 엘리야 선지자로 말미암아 바알 신앙이 얼마나 헛된 지가 만천하에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보았던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대결을 신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짜 신인지? 아니면 바알이 진짜 신인지? 대결하여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과 바알의 선지자들이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 신인 것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가 대결을 벌였습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불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번개와 비의 신이니까 불을 내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850명의 선지자들이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엘리야가 바알이 지금 자고 있을지 모르니 더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을 베어 피를 흘리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발악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나서게 됩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큰 소리를 저지르지도 않고 몸을 베어 피를 흘리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이 정말 진짜 신인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것과 바알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짓 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바알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의 아들 아하시야조차도 그의 부모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완악함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사람의 완악함이 얼마나 단단한지 그것을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값비싼 보석이기도 하지만, 그 단단함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는 다른 것으로는 자를 수 없고, 같은 다이아몬드만 자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단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단한 다이아몬드와 같은 마음을 사람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7:12절에 보면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고 말씀합니다. 다이아몬드 같이 그 마음이 단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아하시야의 마음이 딱 그러합니다. 분명 바알이 헛된 신인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는커녕 끝까지 바알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완악함이 단단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그것을 가로 막던 애굽의 바로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왕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애굽 왕은 거절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려서 애굽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동시에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을 하나 내린 후에 애굽 왕에게 이스라엘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다른 재앙을 내리는 식으로 그렇게 차례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처음 몇 번 재앙을 당하여 큰 피해를 얻었으면 그 때 정신 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은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고집을 피웁니다. 그래서 결국 10번째 재앙까지 갔고, 그 결과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당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낸 후에 애굽왕은 다시 마음을 악하게 먹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였습니다.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당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고집할 때 주어지는 결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꼭 아하시야와 애굽 왕 같은 특별한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사실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아주 완악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것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단단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결심이나 결단으로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몇 가지 습관이나 행동정도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완악함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에스겔서 11:19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우리의 완악하고 단단한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힘써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아하시야나 애굽 왕처럼 망령되이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 보면 아하시야가 왕이 된 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이 말씀에는 아하시야가 당한 2번의 추락이 나옵니다. 첫 번째 추락은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하시야가 다스리는 북이스라엘의 힘이 떨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추락은 아하시야 본인 몸에 실제로 일어난 추락이었습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 왕궁에 있을 때 그만 다락 난간에서 떨어졌는데, 그 병세가 매우 심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하시야는 자신이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알고자 해서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도록 사신을 보냈습니다. 에그론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 도시 중에 하나로, 아마도 아하시야는 에그론이 가까웠기 때문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도록 한 것 같습니다.
이 때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엘리야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이 살 것을 물으러 사신을 보낸 아하시야를 책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게 하느냐”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면서 이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의지한 아하시야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이 말씀을 아하시야의 사신에게 전하였고, 아하시야의 사신은 에그론으로 가지 않고 왕에게 돌아가 엘리야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하시야에게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색이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는 하나님이 아닌 블레셋의 한 도시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아하시야의 불신앙이 아닙니다. 아하시야는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정말 그 마음이 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아하시야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그런 불신앙을 즉시 심판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고, 또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사신에게 말을 전하고, 그래서 아하시야가 듣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했으니 하나님도 아하시야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대신 무서운 진노로 심판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어떤 심정으로 하셨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은 흔히 하는 말로 하면 “아주 모양이 빠지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아쉬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 안 듣는 아하시야를 심판하면 그만입니다. 뭐 이렇게 구구절절이 천사를 보내고, 선지자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이렇게 하느냐”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악인이라도 하나님은 그가 망하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18:23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악인이 망하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악인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애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하시야를 그냥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중에 아하시야처럼 그렇게 악한 사람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 또한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따라 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할 때가 많았던 우리들입니다. 마음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죄의 달콤함에 빠져 살았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 우리입니다. 하지만 악인이 망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살아서 이렇게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벌써 심판 받고 멸망 받았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죄인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즉각 심판하지 않고 인내하시며 기다려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고 애타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고 단단하게 하지 말고, 늘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같은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오래참고 인내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반드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고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