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제목: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론
오늘 우리는 11시 예배 이후에 ‘은곡교회 담임목사 위임투표 건’으로 임시공동의회를 소집하였고, 그 시간을 통하여 은곡교회 담임 목사건에 대한 위임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아무런 사고 없이 모든 순서를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의 더 큰 투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4일 앞으로 다가온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입니다. 이번 선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지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지금 우리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국제적으로는 현재 저희 나라를 빼고 일본,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국까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우리 나라만 이러한 국제 정세에 있어서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중국의 사드보복에 대하여 국제사회 여론에 호소를 하겠다던 정부는 지난 17, 18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G20 회의에 참석은 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더 차가운 국제정세만을 파악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되돌아 오는 시간이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전해들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 속에서 국내 상황도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상황이죠. 경제는 더 안좋아져서 내수 상황도 안 좋고 다들 하는 이야기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죠. 국민들의 가슴에는 지도자에 대한 배신과 실망으로 힘들어 하는 상황이에요. 이제 새로 뽑히는 대통령은 국민들의 이러한 상처를 싸매어줄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시키며 대한민국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갈 대통령이 선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 대통령 선거는 후보의 출신 지역이 어디인지가 굉장히 중요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후보들과 여론 및 언론에서는 더 이상 후보자들의 출신 지역을 보고 투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공동의 의견인 거 같습니다. 후보자의 출신 지역이 아닌, 그 후보자의 됨됨이 곧 얼마나 청렴하며 진실되며 성실과 실력을 갖추어서 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인물인가? 그리고 그들이 내어놓은 많은 정책들이 과연 진실로 모든 국민을 위한 것인지? 실현 가능한 정책들인지를 보고 투표를 해야 한다는 거죠. 출신 지역으로 편을 가르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본론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나와 다른 출신들에 대한 선입견과 그들을 향한 판단이 문제라고 볼 수 있는거 같아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에 오직 두 부류로 나누어서 바라봤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들과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못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방인들이었어요. 그리하여 1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모두 없애버리고 오직 하나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묶는데 그 사용되는 단어는 바로 다음 구절인 16절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단어에요. 그러면서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어 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16절을 보게되면요,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서 나오는데, 하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16절이 너무 중요한데요, 이 시간 저희가 소리내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6절을 보니 의롭게 되는 것에는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무엇이 옳은 방법이라고 하는 건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합니다.
16절에서 바울이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문장,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사실 유대인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겨오던 구약에서 강조하던 문장입니다. 시편 143:2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오고 있었습니다.
시편 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메시야의 조상으로 여기는 다윗이 고백한 시에요. 구약이 이렇게 확실하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율법을 행하라는 거예요.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성경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울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약의 로마서 3:20에서 바울이 다시 거듭 강조하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이 세상에, 지구 상에, 온 은하계에, 그리고 모든 시간의 역사 속에서도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거듭 강조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 이신칭의의 문제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문제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어요. 보통 우리가 ‘이신칭의’를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을 말하는데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은 그런 단순한 상황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가 쓰여지고 있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요?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요? 예수님을 순수하게 믿던 그들에게 다른 복음이 들어온 겁니다. 그 복음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잘한 일이지만, 너희는 우리처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에요. 그 차이를 잘 아시겠습니까? 갈라디아교회의 이신칭의 문제는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상태를 두고서 바울이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하는 겁니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전에 바울이 헐었던 것이 무엇인가요?! 율법의 행위 아닌가요? 종교적인 자기 열심 아니었나요? 원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사도행전 22:3~5절에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얼마나 율법의 행위에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어요.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으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이 얼마나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인가요? 태생은 당연히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가장 유명한 유대 랍비의 아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믿고 전파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했던 자라고 하잖아요. 그런 바울이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율법으로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이전에 자신이 율법의 행위로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하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 바울은 오히려 온갖 핍박 가운데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 변하게 되었잖습니까? 그 바울이 이제 고백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그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려 하느냐?!”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왜 내가 그토록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소중한 주일 오후 시간에 어디 놀러가지 않고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혹시 우리의 이러한 열심히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때에는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과 다른 누군가를 잘 용납하고 계신가요?!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혹은 나와 말투가 다르거나 나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약간씩 다른 것을 두고서 여러분은 사랑으로 잘 용납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나와 다른 그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마음 속으로 비방하거나 미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갈라디아교회에 찾아온 자들, 다른 복음을 가지고서 율법의 행위인 할례를 강조했던 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그 고정관념, 그리고 너희들은 이방인이라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정작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하나로 부르신 주님의 목적에는 오히려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갈라디아서 3:28에 나오는 큰 은혜를 누리지 못했죠. 갈라디아서 3:28에서는 뭐라고 하죠?!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 귀한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 분 안으로 하나된 몸으로 부르실 때에 더 이상 과거의 신분, 자격, 능력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되게 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의 것들에 얽매여 있거나 다시 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안타까운 일이 우리 은곡교회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아주 행복한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방법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하여 살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율법에 대하여 죽으셔야 합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날 죽어도 그 죄 값을 치루고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말도 안되는 귀한 사건을 하나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20절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율법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귀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20절의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바로 주님과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 내가 백날 죽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런 결과는 죄인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합당한 결과예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자리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우리 대신, 우리와 함께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은곡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으로 못 박히셨습니까? 그런즉 이제는 여러분이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십니까?
십자가는 어떤 곳입니까? 바로 죽음이 있는 곳, 사망이 있는 곳,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 모두 무너지고, 제자들이 떠난 곳, 바로 그곳이 십자가 아닙니까? 기존에 내가 믿고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부인해야만 하고, 아픈 현실들,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을 모두 직면해야만 하는 곳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세상이 모두 실망하여 고개를 돌렸던 그 십자가에서 역설적으로 온 인류의 생명이 탄생한 장소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장소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으로 꽃을 피운 장소입니다. 그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모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니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십자가를 너무 감성적으로만 이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가슴이 뜨거워져서 저희 중고등부 학생들의 경우 수련회 둘째 날 밤에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우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20절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마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문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다가 더 나아가서 그냥 현실을 포기하고 도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세요. 내가 십자가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문장을 사용해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결코 부인하거나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서 1:22~24에서 육체 가운데 거하는 삶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육익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의 육체 가운데 거하는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는 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20절 하반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이죠. 문장이 길면 제가 줄여서 알려드릴께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을 믿으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내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죄를 지은 자인데, 곧 율법의 행위 , 나 자신의 잘남과 의로움과 자존심과 기준으로 살고자 했던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이 사실을 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잊습니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이 모든 일들을 이제 믿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믿는 삶을 21절에서 멋지게 정리해주고 있는데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 속에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폐하지 마시고 간직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의 교리는 단순히 딱딱한 지식이 아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간직하며 감사하며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귀한 진리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디 돌아오는 한 주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으로 잘못 된 나의 부족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사시는 성도님들의 귀한 삶이 되시길 간절히 바라며, 나와 다른 형제와 자매를 인정하고 품어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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