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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7/5,주일-오전) "교회 기초 다지기(4): 성령님" / 요 14:16~17 / 고한율목사

(7/5,주일-오전) "교회 기초 다지기(4): 성령님"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10장, 182장, 186장, 53장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익은 보리를 하나님께 바치면서 감사를 드렸던 절기였습니다. 또한 맥추절은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불렸는데, 이것은 처음 익은 보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후로 7주간이 지나서 보리뿐만 아니라 밀도 다 추수하여서 지켰던 절기입니다. 7주간이 지났다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부르고, 또한 50일이 지났다고 해서 오순절로 불렀습니다. 아무튼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모두는 보리와 밀을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 맥추절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시기를 조정하여 보리를 추수할 때인 7월 첫 주에 이렇게 지켜왔습니다. 저희 같이 서울에 있는 교회들은 보리농사를 짓는 성도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절기가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처럼, 우리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맥추감사주일을 보낸다면 그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보를 보고 조금 의아해 하신 성도님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분명 맥추감사주일인데, 설교본문과 제목을 보니까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교회 기초 다지기 네 번째 성령님”입니다. 왜 맥추절에 대한 설교를 안 하고, 성령님에 대해 설교를 하나 생각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설교는 맥추절과 정말 딱 맞는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가장 관련이 깊은 절기가 바로 맥추절, 더 정확히 말하면 오순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예수님 믿는 신자들에게 임하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오순절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모든 신자에게 성령님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성도들은 맥추절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무엇보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야말로 우리 신자에게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선물인 성령이 바로 오순절에 신자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맞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인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님에 대해 알게 될 때 우리의 감사는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그저 하나님의 어떤 능력이나 도구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부흥회를 하면 부흥사들이 와서 손을 뻗으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성령 받아라” 그럽니다.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행동입니다. 성령은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원래 뜻은 “옆에서 대신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법정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변호해 주는 변호사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성령님이 그저 어떤 능력이나 도구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원래 보혜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은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것이죠. 거룩하신 영인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무엇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까? 요한복음 14: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데, 무엇으로 가르치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심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3:16절 말씀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1:21절에 보면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님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시는데, 이것을 바로 성령의 조명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조명이란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머리가 똑똑하다고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철학박사라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마 것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도와주신다면 어린 아이라도 성경을 읽고, 거기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은 무엇보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말씀의 뜻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그것을 열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의 엉터리 주장에 불과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경을 해석해 줄 특별한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성령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2: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리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님이 친히 우리의 선생님이 되시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쳐 줄 어떤 특별한 사람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목사도 필요 없고, 신학자도 필요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목사와 신학자가 교회에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그의 조명하심을 구할 때 하나님의 자녀다운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나 읽을 때 오직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복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 주시는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해 주시는가 하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신자라고 해서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할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낄 때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나를 몰라주는 것 같고,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때 참으로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며, 우릴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에게는 절대적인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인 제가 성도님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을 지키기 위해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도님 가운데는 목사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참 고마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힘이 납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여러분, 목사가 기도해도 이렇게 힘이 나는 법인데,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매순간 간절히 기도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탄식하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바로 그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늘 간절히 기도하시는 성령님을 더욱 더 의지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더욱 성령님을 의지하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됨을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십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를 세상의 것으로부터 떨어뜨려서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한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두 가지 삶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성령을 따르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입니다갈라디아서 5:16~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까?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르는 삶이 아니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 사이에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제가 전에 청년부를 맡고 있을 때 수련회를 갔습니다. 저녁 집회에 제가 청년들에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일주일에 교회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선데이 크리스챤입니까? 그러면서 여러분 이 둘 중에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면 모두 선데이 크리스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한 청년이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거예요.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데이 크리스챤도 아니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중간쯤에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중간이 없다고 하니 정말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중간쯤에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삶 가운데 육체의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와 성도의 삶에서 복음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 대신에 이 세상과 똑같은 더러운 악취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시면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억누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욕심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듣고 즉각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성령님의 말씀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시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일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우리 안에서 이런 역사를 이뤄 가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능력 있는 신자의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많은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많이 압니다. 신학을 잘 이해합니다. 봉사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으로만 그 일을 합니다. 불만이 쌓이고, 지쳐갑니다. 이렇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승합차를 사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의자도 좋고, 에어컨도 좋고, 문도 자동문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동차인데, 그 안에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림의 떡이 되지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동차가 좋아도 기름이 없다면 그 차는 고철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봉사도 잘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신자라도 성령님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마치 기름 없는 자동차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데살로니가 5:16~18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귀한 신앙생활입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힘으로 항상 기뻐합니까?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합니까?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 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무슨 뜻입니까?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서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없앨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혹시 성령을 소멸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님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 역사하심을 무시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거기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분명하게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았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리와 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보리와 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 성령님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주시는 가장 복되고 귀한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외 없이 받게 되는 선물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귀한 선물인 성령님을 받고도, 우리는 성령님을 외면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늘 기쁘고 활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더욱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