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주일오전) / "교회 기초 다지기(10) : 그리스도인의 생활" / 로마서 12장 1 ~ 2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38장, 315장, 327장, 53장
150816_교회 기초 다지기(10)_그리스도의 생활(롬12장1-2절)_고한율목사.pdf
오늘은 교회 기초 다지기 10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구원, 기도, 예배, 지난주에 살펴본 교회까지 이 모든 주제들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내용이며, 또한 교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주제들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 가지까지 살펴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무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뿌리가 잘 내리고, 줄기와 가지가 튼튼해 보이는 나무라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분명 문제가 있는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삼위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성경과 구원에 대해 잘 배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삶 속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야고보서에 나오는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2: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바로 삶 속에서 맺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삶 가운데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있는 교회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옛날에 수천 명이 모였던 교회에 이제는 노인 수십 명만이 모이는 경우가 흔하다고 해요. 그래서 교회 건물을 유지할 수 없어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교회는 술집이 되고, 또 어떤 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유럽의 교회는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1년 정도 독일에 가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하고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시내에 나가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전철을 타러 갔습니다. 역에 가서 먼저 차표를 샀어요. 그런데 문제는 차표를 어디에 내야 하는지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 때는 독일어를 못하니까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20분을 샅샅이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알게 된 사실은 전철역에 차표를 내는 곳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그냥 전철에 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냥 내리면 됩니다. 차표를 사기는 하지만, 그것을 검사하는 곳은 없었던 것입니다. // 저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차표를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전철을 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사람들이 차표를 살까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게 전철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독일 사람들이 정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독일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에 하나가 바로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가르침이 여전히 독일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검사하지 않아도 정직하게 차표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독일 사람의 모습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 속에는 그 열매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우리가 독일 사람들을 그저 교회 나가지 않는다고 쉽게 정죄할 수 있을까요? 참된 믿음이란 입으로만이 아니라, 그 삶을 통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한 나무가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삶 속에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열매를 삶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권하고 있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5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그 중에 번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제물 전체를 불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헌신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이 번제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마치 번제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너희의 모든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1절 말씀을 시작하는 ‘그러므로’라는 단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그러므로’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 제 아이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빠, 나 아빠 딸 맞지?” “그렇지” “아빠,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 “응, 사랑하지” “그러므로 아빠는 나에게 예쁜 인형을 사 줘야 해” ‘그러므로’라는 말이 언제 사용되지는 아시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써서 그 이유가 앞에서 말한 내용들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2장 앞까지 말한 내용, 즉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단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구원”입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관해서 가장 잘 설명한 성경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를 보면 인간의 죄가 무엇이고,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가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 1장부터 11장을 읽으면 ‘아!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구나’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렇게 구원하였으니, ‘그러므로’ 구원받은 너희가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순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먼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고 먼저 말씀한 다음에, 그러므로 구원받은 너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순서는 항상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순서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항상 구원을 먼저 말씀하신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율법을 주셨습니까? 아니면 애굽에서 탈출한 후에, 즉 구원을 받은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까? 출애굽한 후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율법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 보고서 그들을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구출하신 다음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누가 지키는 것입니까? 구원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변치 않는 순서입니다. 언제나 구원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나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니,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너희 몸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자가 하는 모든 봉사와 섬김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공로를 쌓으려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여러 직분을 맡아서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하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버려 두면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절을 시작하는 ‘그러므로’에 담긴 뜻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날마다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더욱 감사가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다름 아닌 우리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구약백성들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까? 소나 양 같은 짐승이나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려야 할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오늘 예배 오시면서 소나 양을 가지고 오신 분 없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제사는 없어졌지만,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인 제사, 영적인 예배는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고 할 때, 우리의 몸은 단지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몸은 우리의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 우리의 말과 행동을 포함한 그야말로 우리의 전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우리의 삶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합동신학교의 송인규 교수님은 생활예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예배는 예배당이 아닌,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어느 곳에 있든지 있는 그 곳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있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 이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되도록 힘쓸 때, 그것이 바로 생활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터에서 일을 할 때, 단지 돈을 버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터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생활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예배에 대해서 골로새서 3:22~24절이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은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종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업의 상을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종은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종이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와 선교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예배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살았던 프랑스 사람 중에 로렌스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로렌스 형제로 많이 알려졌는데,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은 수도사로서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살았던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며 살았던 로렌스 형제가 평생 수도원에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에서 부엌일을 하였습니다. 즉 많은 시간을 다른 수도사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 하면서 보냈던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읽는 시간보다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음식을 만들 때나, 설거지를 할 때에도 항상 주님을 위해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남이 보면 하찮은 일일 수 있지만, 로렌스 형제는 그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실이나 예배당이 아닌 부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처럼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드리는 주일예배를 시작으로 하여, 일주일 내내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생활예배를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활예배를 드리려고 애쓴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이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분명 마태복음 5:16절의 말씀처럼 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생활예배를 드린다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신자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생활예배를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 즉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모인 우리 모두가 이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하나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는 우리가 생활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사탄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같은 모습이 되다” “동화되다” “순응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을 이야기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놀라서 금방 뛰쳐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개구리를 아무런 저항 없이 뜨거운 물로 삶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통에 차가운 물을 넣고 거기에 개구리를 넣습니다. 그리고 그 물통을 불로 서서히 끓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물이 따뜻하니까 편하게 있습니다. 그 상태로 물이 팔팔 끓을 때까지 있게 되고, 곧 삶아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방식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무한경쟁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프리카에서는 1초에 4명이 먹지 못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세상에 음식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에서는 넘쳐서 버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없어서 죽고 있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결국 사탄이 만든 무한경쟁사회 속에서 우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순응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뜨거워지는 줄 모르고 따뜻한 물을 즐기다 죽은 개구리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생활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변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무엇이 변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뀌면 우리의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죄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옴으로써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모두 망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죄의 해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십자가와 거기서 우릴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거기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죄된 마음이 새로워지고, 바로 그렇게 새로워진 마음으로부터 변화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이제는 자신의 뜻과 고집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로 마음을 새롭게 할 때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생활예배를 우리가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로 변화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그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의 열매가 맺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 일터,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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