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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8/9,주일-오후) / "살전 강해(8)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 살전 3:1 ~ 10절 / 고한율목사

(8/9,주일-오후) / "살전 강해(8)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 살전 3:1 ~ 10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57장, 543장

150809_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살전 3장1-10절)_고한율목사.pdf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까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디모데를 보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6~10절까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녀 온 디모데의 보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2: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래서 바울은 두 번이나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가려고 했지만 사탄이 막아서 못 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찾아가고자 한 것은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이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머문 것은 불과 3개월 정도였습니다. 이 3개월 동안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는데,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지도자들이었던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도시를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불과 3개월 된 어린 교회가 지도자를 잃은 상황에서 과연 제대로 생존할 수 있을까 바울은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일행 중 한 명인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데살로니가에서 추방된 바울과 그 일행은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덴은 철학으로 유명했던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덴까지 멀리 왔지만, 바울의 마음에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염려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행 중 한 명인 디모데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내는 디모데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우리의 형제이며,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바울은 디모데를 우리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사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형제라기보다는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디모데전서 1:2절에 보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그만큼 바울과 디모데의 나이가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나이뿐만 아닙니다. 학식이나 경험 그 무엇으로 비교해도 바울이 디모데보다 월등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둘 다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형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 모이는 모든 성도는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신분이 어떠하든지,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서 얼마되지 않은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조덕삼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전라도 김제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신자가 된 이후 이 분은 교회를 짓도록 자기의 땅을 헌물하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조덕삼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였습니다. 주인이었던 조덕삼은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신분은 전혀 달랐지만,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 교회에서 장로선거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집주인을 물리치고, 머슴이 교회의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집주인이었던 조덕삼이 이 투표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조덕삼은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은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덕삼은 자신의 말대로 자기 집 머슴이었던 이자익 장로를 잘 도와 교회를 충성되이 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이자익 장로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모든 생활비와 학비를 다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로가 된 조덕삼은 자신이 시무하는 금산교회에 이자익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끝까지 함께 교회를 섬겼다고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 안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집 주인과 머슴의 관계는 사라지고, 서로 형제가 되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여전히 서로를 차별하고, 서로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는 복음의 능력보다 유교적인 전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을 닮아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이 세상을 역전시키는 능력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이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진정한 모습입니다. 


 나보다 약하고, 못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음으로 서로를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이 차이와 생활수준, 배움의 수준이 다르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은곡교회에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은 이처럼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일꾼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정말 어머어마한 말이 아닙니까? 우리 인생이 뭐라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불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바울이 디모데를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른 것은 결코 디모데 개인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일이 됩니다. 목사나 선교사만이 성직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이 성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사에 주님을 위해 일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동역자로 불러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의 직분을 수직적으로 이해합니다. 전에 초등학생 둘이 열심히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열심히 논쟁하니? 물었더니 저에게 대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높아요? 장로님이 높아요?” 목사가 높은지 장로가 높은지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 높습니까?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교회 안의 직분에는 절대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직분을 높고 낮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교 사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절대 직분을 높고 낮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직분은 왜 생긴 것입니까? 에베소서 4:11~12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보면 첫째, 직분은 누가 주십니까?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할 때, “그”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모든 교회의 직분은 예수님이 세우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직분을 받은 분들은 자신의 직분이 예수님께 왔음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책임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직분을 주시는데, 왜 교회에 직분을 주셨습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간단히 말하면 성도들을 잘 섬겨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가 잘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섬기지 않는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는 직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은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닙니다. 직분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해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은 직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자신의 동역자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직분에 대한 바른 마음을 가지고, 무엇보다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사에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의 형제요, 하나님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2절에 보시면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를 왜 보냅니까?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위해 디모데를 보냈습니까?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입니다.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에 보냈던 디모데가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을 듣고는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서 감사하였습니까? 7절입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은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소망을 말하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면서 무엇보다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다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돌아온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가장 기뻐했던 사실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 또한 그들의 믿음을 보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관심은 믿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야말로 우리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믿음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뿐만 아닙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상관없이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서 2:4절에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만이 신자는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도를 생각할 때 바울의 관심은 오직 그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아픈 사람들은 없는지, 가정적으로는 문제 있는 사람이 없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성도가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 처해 있더라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사함으로 살 수 있음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도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우선되는 것은 믿음을 주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환우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여러 어려움에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꼭 단단한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 저에게 우리 은곡교회와 성도님들을 향한 소원을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모든 성도님들이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면 이보다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무엇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구하셔야 합니다.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도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전도하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생활을 할 때에야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지를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더 단단한 믿음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살 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믿음을 부어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