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주일-오후) "살전 강해(7)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살전 2:17 ~ 20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421장, 218장
150802_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2장17-20절)_고한율목사.pdf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났을 때 자신이 가졌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이라고 할 때, ‘떠났다’는 이 표현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고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으로 다시 이 말씀을 풀어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에게서 떨어져 고아가 된 것은”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 누가 진짜 고아입니까? 사도 바울을 잃어버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입니까? 분명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고아처럼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아가 된 것은 너희가 아니라 바로 ‘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표현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도자를 잃어서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느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마음 깊이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도 너희와 같이 버려진 고아처럼 느낀다고 말함으로써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며,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주 주의를 기울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성도이면서도 얼마나 자주 말로써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처럼 선한 말로서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말이 가진 선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은 아주 파괴적인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야보고서 3:8절에 보시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말을 하는 혀를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41편 3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항상 해야 할 기도입니다. 여기에 다가 더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입이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은곡교회 안에는 무시하는 말, 죽이는 말이 사라지고, 격려하는 말, 살리는 말이 더욱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닮은 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도의 교제가 더욱 더 깊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고아가 된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데살로니가에서 추방된 후에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고자 했지만 그 길이 막혔다고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도 바울은 17절 하반절에서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바울은 몇 번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사탄에 의해서 좌절되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막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분명 사탄의 방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 성도가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6: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즉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치자들과 권세,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즉 모두 합쳐서 사탄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탄이 아닌 사람과 싸우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엉뚱한 곳에서 힘을 다 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라는 엄청난 장수가 등장하였습니다. 그 키가 3m에 가까운 거인으로 엄청난 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를 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싸울 용기는커녕 오히려 도망가는 군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형들을 면회 온 다윗이 이런 상황을 보고는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을 합니다. 이 때 다윗을 막아선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다윗의 첫째 형이었던 엘리압이었습니다.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면서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라고 말을 했습니다. 다윗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형과 싸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형에 말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자신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적은 오직 골리앗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형인 엘리압과 싸웠더라면 나중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적만 상대를 했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적이 누구입니까? 우리 옆에 있는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사탄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엉뚱한 곳에 힘을 쏟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사탄임을 알고, 그렇기에 더욱 더 영적으로 잘 무장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몇 번이나 가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생각을 19~2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때에 우리의 소망과 기쁨,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너희”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자랑의 면류관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면류관은 운동선수가 우승을 할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받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아무리 선수가 많이 훈련하고, 열심히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면류관을 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면류관은 선수에게 있어서 존재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존재의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정말 자신의 목숨을 다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믿음 가운데 세우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자신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재림하신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자랑의 면류관을 받게 될까요? 바울은 자신이 여러 지역마다 교회를 세운 것, 그것을 자랑의 면류관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무려 13권을 쓴 것 그것 또한 자랑의 면류관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온갖 고난을 받으며 목숨 바쳐 선교 여행을 한 것 또한 자랑의 면류관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자랑의 면류관은 오직 하나 성도였습니다. 성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 바울에게 이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요? 주님 앞에 가장 귀한 자랑의 면류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영적으로 돌보고, 격려하며, 말씀으로 든든히 세운 그 성도가 아닐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여 믿음으로 산 그 사람이 아닐까요? 이것보다 주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눈이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은 재림하신 예수님 앞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성도가 바울의 자랑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랑의 면류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내가 저 집사님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저 권사님을 통하여 다시 믿음을 회복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절망 가운데 놓여 있을 때, 저 장로님의 기도와 보살핌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다면 얼마나 귀할까요?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얼마나 큰 영광을 얻게 될까요? 저는 우리 은곡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학교 한 아이라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자랑의 면류관으로 여기며, 그렇게 사랑으로 돌보고,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한다면 정말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그 사람이 나의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들은 이런 본질을 놓쳐 버리고 다른 곳에 힘을 많이 허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좋은 교회 건물을 짓는 것, 교회의 조직을 잘하는 것, 큰 사업을 잘하는 것,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빠져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것들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 봤더니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더랍니다.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뒤로 쭉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서 있느냐 물었더니,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 그 뒤에 그렇게 서 있는 거랍니다. 물론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 전혀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면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내가 복음을 전해서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만난다면 이보다 더 감격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뒤에 서 있지는 않을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본다면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하는 대로 내 자랑의 면류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 감격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우리가 부지런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기도를 해 주며, 여러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않는 이웃에게는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에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또한 본받아 다른 성도들을 더욱 사랑하고, 잘 섬길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로 사랑을 나타내고, 또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들이 우리의 자랑의 면류관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와 우리 은곡교회에 이런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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