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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7/26,주일-오후) / 살전강해(6) "바울의 감사" / 살전 2:13~16 / 고한율목사

(7/26,주일-오후) / 살전 강해(6) 바울의 감사 / 살전 2:13 ~ 16절 / 찬송가 : 406장, 341장 / 고한율목사

150726_바울의 감사_(살전2장13-16절)-고한율목사.pdf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 16절 ]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 읽은 말씀에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두 가지 감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바울의 감사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살펴보고, 또한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받았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사실 데살로니가전서를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2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3:9절에 보면 바울은 또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이러한 연속적인 감사를 통해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회가 모범적인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모범적인 교회로 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모범적인 교회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안과 밖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으로는 교회의 지도자가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교회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피난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없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같은 데살로니가 시민들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보시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음과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동족이 주는 고난은 아마도 당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선교하던 당시 데살로니가 도시는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로마 황제들은 백성들이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이며, 주님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황제숭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황제숭배는 데살로니가나 빌립보와 같은 큰 도시들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를 잘해야 로마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전하였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우리가 순종해야 할 유일한 주님이라고 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5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이 무엇을 전한다고 말씀합니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메시아, 구원자를 뜻하니까, 결국 바울이 전파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이며,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며, 주님이라는 사실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로마 황제가 자신들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는데, 복음을 받아들이면, 황제가 아닌 예수님을 새로운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많아지면 그만큼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안과 밖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든든히 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3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과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통해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꿈을 통해서나, 어떤 환상을 통해서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선지자가 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을 주시는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는 좀 더 특별한 방법을 선호할 때가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을 보고 싶어 하고, 또한 신령하다고 하는 예언자에게 찾아가서 말씀을 받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저 성경을 읽고, 또한 성경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제 꿈이나 환상, 예언자 등을 통해서 이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말씀해 주셨고, 또한 우리 신자 모두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지금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드러내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말씀하신 것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읽거나 들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다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예언자나 여러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가장 확실한 방법인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다 기록되지 못한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마음대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자신이 받아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성경에 모두 기록되었음으로,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성경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이것을 무시하고, 보다 특별한 방법을 선호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가운데 설교자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들음으로, 또한 성경을 각자가 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배를 드릴 때 더욱 진지한 태도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성경을 읽을 때 대충 읽지 말고, 정말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가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연약한 사람을 통해 주어지는 말씀이지만,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말씀의 기원인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 자체가 아니라, 다른 외적인 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며, 그의 삶의 태도가 어떠하며, 심지어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느라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설교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품위와 복음에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그렇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설교자가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안에 여러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 믿음을 저버린 목회자에게 받은 세례가 유효한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로마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식종교로 인정하기 전까지 신자들은 엄청난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핍박 가운데 믿음을 저버리는 배교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들 가운데는 불행하게도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313년에 기독교 공식종교로 인정받고, 핍박이 사라지자 믿음을 저버렸던 배교자들이 교회 안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생긴 논쟁 가운데 하나가 배교한 목사가 배교하기 전에 베푼 세례가 유효하냐, 아니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입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배교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은총의 박사로 불렸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비록 배교한 목사에게 받은 세례라도 그 세례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례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연약한 목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연약한 설교자로 말미암아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원은 그것을 말하는 설교자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고 한다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아무리 유능하고 경건해 보이는 설교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이나 철학을 설교단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우리 또한 누릴 수 있기를 바라고,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듯이, 우리 은곡교회도 말씀 가운데 든든히 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았음을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감사는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에 대해 감사합니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점을 본받았습니까? 바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스데반과 야보고의 순교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에 있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 또한 동족으로부터 동일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황제숭배와 관련된 핍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다름 아닌 고난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본받을 것이 없어도 그렇지 고난 받는 것처럼 본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가 일부러 고난을 본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왜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고난을 본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가 모였을 때 다른 교회 얘기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어떤 교회는 분위기가 따뜻해, 교회당이 밝고, 의자도 편해. 교회 안에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이 많은지 몰라. 전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 이렇게 말하면서 이런 교회를 본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좋은 장점들은 당연히 본받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뭐라고 말씀합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본받았는데, 뭘 본받았느냐 하면 고난 받는 것을 본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고난 받는 교회를 본받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받을 것이 없어서 고난 받는 것을 본받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것 다 재껴 두고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 받은 유대 교회들을 본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이야 말로 그 교회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는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은 승리주의에 너무나 물들었습니다. 


 승리주의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세상을 힘으로 압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의 각 나라에서 십자군을 일으켜서 이슬람 국가와 전쟁을 벌인 일입니다. 이 때 얼마나 많은 이슬람 사람들을 기독교인이 살육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나중에 십자군 전쟁은 실패하여 교회도 큰 피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군 전쟁의 원인 가운데는 교회의 승리주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많은 돈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이것을 사용하여 이슬람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러한 승리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형교회가 많아지면서 이 사회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교회 눈치를 봅니다. 방송사들이 가장 다루기를 꺼려하는 문제가 바로 교회 문제라고 합니다. 교회 문제를 건드리면 수천 명의 신자들이 와서 방송국을 초토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사용하여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승리주의입니다. 이 승리주의에 물들면, 십자가와 고난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고난은 승리가 아닌 패배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한 번도 우리에게 승리주의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끝까지 교회와 성도는 고난 가운데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이 사실이 너무나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승리의 책 아닙니까? 그런데 용과 짐승으로 대표되는 사탄을 누가 이기십니까? 갑옷을 쓰신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어린양이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7:14절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누가 사탄을 이깁니까? 어린 양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냥 어린 양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5:12절에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와 우리 신자의 참된 승리는 무엇을 통해 주어집니까?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 가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여러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부러움과 찬송을 받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닮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난당하는 것을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은곡교회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것 때문에 오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기준으로 자꾸 힘을 가지려하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힘쓰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닮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당하게 되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닮아서 불순종의 길을 가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 은곡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역사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면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