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7/19,주일-오전) / 교회 기초 다지기(6) : 구원의 풍성함 / 눅 15:25~32 / 고한율목사

(7/19,주일-오전) / 교회 기초 다지기(6) : 구원의 풍성함 / 누가복음 15장 25 ~ 32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21장, 273장, 313장, 53장

150719_교회 기초 다지기(6)- 구원의 풍성함 (눅15장 25-32절)-고한율목사.pdf

[ 누가복음 15 : 25 ~ 32 ]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그의 책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이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 가운데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거나 혹은 미래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지금 현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금의 현실을 부정합니다. “그 때는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데”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은 모두 자신의 불행한 과거 때문이라고 지난날을 탓하며 원망으로 현재를 살아가기도 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막연한 미래에 집착하는 나머지 지금 현재를 무시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몇 년 후, 몇 십 년 후에 이뤄질 일을 꿈꾸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은 무조건 참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여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지,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사람치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재의 삶은 언제나 원망과 후회, 참음과 희생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말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이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가 곧 과거가 되고, 미래가 곧 현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재를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행복한 과거도, 행복한 미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가장 중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천국에 가는 것만을 신앙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예전에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는 분들이 뭐라고 외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식으로 구원을 이해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성도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구원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기껏해야 구원은 우리가 죽어서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죽어야만 경험하는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받은 구원을 지금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읽은 본문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 주일에 살펴 본 탕자 이야기의 속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쫄딱 망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주 기쁘게 받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이야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탕자이야기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떠났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올 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온 후에 있었던 아버지와 첫째 아들 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과 달리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그런 모범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께서 기쁘게 받아주시자 첫째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오늘 본문 29~30절에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 아들이 화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면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때문입니다. 막대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께서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잔치를 열어주는 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이 화가 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29절을 잘 보시면 첫째 아들의 진심이 나타납니다. 첫째 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을 합니다. 


 첫째 아들이 진짜 서운 한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항상 잘 섬겼는데, 그런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기 멋대로 산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낌없이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화가 난 것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고 참고 인내한 자신의 노력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지금 뭐라고 합니까? “아들아 섭섭해 할 필요 없다. 내가 너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내 모든 재산이 바로 네 것이 아니냐. 염소 새끼 한 마리가 아니라, 이 집의 모든 것이 바로 네 것이다!” 


 이 아버지의 말을 들은 첫째 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첫째 아들이 어떻게 했다고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해 보면 첫째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를 깨닫고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아들은 자신이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서 종처럼 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종이 아니라, 그 집의 상속자였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말처럼 아버지의 모든 것이 바로 첫째 아들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일을 열심히 하고, 아버지에게 잘 보여야만 아버지께 재산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은 그 신분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첫째 아들은 자신이 상속자인 줄도 모르고 종처럼 아버지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둘째 아들에게 잘해 주는 아버지를 보고 서원해 하며 화를 내었던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첫째 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는 둘째 아들과 같은 탕자가 많이 있다면, 교회 안에는 첫째 아들과 같이 자신이 상속자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신앙이 바로 첫째 아들의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죽어서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나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생활이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속자인 것을 모르고 종처럼 아버지를 섬긴 첫째 아들이 그 삶 속에 전혀 기쁨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아들에게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 또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지금 내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려라” 우리는 이 아버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풍성함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서 받는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지금 구원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 성도가 누리를 구원은 어떤 것일까요? 3가지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24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구원은 다른 말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뜻은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 즉 죄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겨진다고 말한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번 한 주 동안 죄를 짓고 살았습니까? 안 짓고 살았습니까? 짓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정직한 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겨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의인은 아니지만, 의인으로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죄를 물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여전히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인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시게 되었고, 우리가 지금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은혜와 복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삶을 볼 때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에는 두 번째 뜻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인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의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의인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를 복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5:12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만을 의지하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지켜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보호하신다면 그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의인,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중에 우리가 죽어 천국에 올 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의인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른 누구가 아닌, 예수님을 믿어 의인으로 여김을 받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늘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힘쓰세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의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 품고,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려 할 때 하나님은 약속한 복과 은혜를 반드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늘 나와서 하나님이 의인에게 약속한 복과 은혜를 담대하게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구원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영생은 무엇입니까? 보통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생은 “오는 세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지금의 세상과 새롭게 오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세상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무엇보다 사탄이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사탄이 왕으로 군림하는 이 세상은 죽음과 저주,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 구별되는 오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는 세상, 즉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란 사탄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오는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영생이 우리가 죽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1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미 주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으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 교회, 일터 모든 곳에서 영생,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다스림이 순간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 처음 시작은 매우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겨자씨가 땅에 심어지면 시간이 지나 울창한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때, 처음에는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면, 반드시 겨자씨가 울창한 나무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항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이 세상의 어둠과 슬픔, 절망과 저주는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가득한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경험하는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늘 구하시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가정 가운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의한 일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성도님들은 꼭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영생을 주심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참으로 복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어떤 권세가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16~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속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모의 전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탕자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내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너는 나의 상속자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가장 부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아주셨기에 우리의 삶 또한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부자로 살게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봐도 모든 믿는 사람들이 부자로 이 땅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왜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가난해 지면 삶이 불편해지고,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모읍니다. 돈이 우리의 불안을 해결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안을 가져가주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되며 부유한 삶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생의 보장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속자들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상속자, 곧 구원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상속자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아무리 많은 사람도 가져다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 은혜와 복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시고,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바로 지금 누릴 수 있고, 또한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고,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 다스림과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모든 것을 삶 가운데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지금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