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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1/05,주일-오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 마가복음 1:40-45 / 고한율 목사

(11/05,주일-오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 마가복음 1:40-45 / 고한율 목사

주일 1,2부 예배

본문 : 140 ~ 45

2017115

마가복음 강해(8)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찬송가 : 1 , 73 , 270 , 53 // 교독문 89(세례)

 

정호승 시인이 쓴 시 중에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인간의 외로움을 담담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어떻습니까? 괜히 더 외로워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외롭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한다고 핀잔을 줍니다. 할 일 없이 빈둥대니까 쓸데없이 외로운 것 아니냐는 것이죠.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외로움은 할 일 없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외로움이 사람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쁘게 산다고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쁠 동안 잠시 잊고 지내는 것일 뿐입니다. 바쁜 일이 지나가면 어느 새 외로움이 우리 마음을 다시 차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의 경우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어떤 가수가 인터뷰한 것을 보았는데, 수천, 수만 명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정말 자신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마치고 화려한 무대를 내려오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다는 거예요. 불 꺼진 텅 빈 무대와 썰물처럼 빠져 나간 관객석을 바라보면 그렇게 외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 혹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약물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너무 큰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연예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시시때때로 지독한 외로움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로움은 단지 뭔가 부족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만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요한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외로움은 찾아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가끔씩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일탈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몇 해 전에 모지방의 지검장, 즉 그 지방 검찰의 가장 높은 직책에 있던 분이 심야 큰 길 가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적발이 되었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했을까재력도 권력도 명예도 다 가진 분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대로변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시인의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외로움은 돈이 많다고 해서, 권력이 있다고 해서, 친구가 많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파스칼이 그가 쓴 유명한 책인 팡세에게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빈 공간이 있는데 이는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하여 알려진 창조자되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파스칼은 여기서 모든 인간이 가진 외로움의 정체가 무엇이고, 또한 유일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가진 외로움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우리 마음의 빈 공간입니다. 이 빈 공간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우리의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빈 공간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을 채워 넣어도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빈 마음은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 모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되고, 그럴 때 우리의 근원적인 외로움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낫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에 나병환자만큼 외로운 사람이 또 없었습니다. 나병은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불리는데, 피부가 썩어서 아주 흉측한 모습을 갖게 하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의 진짜 고통은 단지 피부가 썩어지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피부가 썩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레위기 13:4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나병 환자로 판명이 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며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나병에 걸린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죽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처럼 스스로를 여겨야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나병환자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끊어졌습니다. 레위기 13:46에 보면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나병환자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마을 안에서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을 밖으로 나가서 홀로 지내야 했습니다.

 

셋째는 가장 심각한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을 판정받을 때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것은 단지 육체가 병으로 말미암아 깨끗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부정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추방당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족과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나병환자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병은 아담 이후로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의 영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는 나병환자처럼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외로움은 영적인 나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처럼 죽은 자와 같은 나병환자가 온전히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여러분 이 말씀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뭐가 이상하지요? 바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병환자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그것도 예수님이 혼자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였습니다. 이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돌 맞아 죽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였다고 말씀합니다(17:12~13).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나병환자가 감히 사람들 앞에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병환자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이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것과 예수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나병환자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는 분명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 앞에 엎드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서 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돌맞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하신 행동이었습니다. 41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뭘까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병환자는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만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병환자를 만지면 똑같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마치 시체처럼 마을에서 격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손으로 친히 나병환자를 만져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저 말씀으로만 나병환자를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은 그저 말씀으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병환자에게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도 하시지만, 친히 그의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을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병 환자의 몸을 손으로 친히 만지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나온 나병환자를 기쁘게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병환자는 모든 관계에서 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한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가 믿음으로 나아올 때 따뜻한 손으로 그를 만져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오면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다는 판정을 받은 그런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오면 꼭 안아 주십니다. 연세가 많은 성도님들은 기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963년에 아주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군에서 탈영한 병사가 한 장교의 집에 들어가 일가족 6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범인은 고재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재봉은 곧 체포가 되었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대의 악마였던 고재봉이 교도소에서 전도를 받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악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의 간증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2000명의 죄수 중에 약 1800명이 전도되었다고 합니다.

 

고재봉이 사형 집행을 당할 때 그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구절을 암송한 후에 찬송가 279장 인애하는신 구세주여와 찬송가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찬양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재봉이 불렀던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양에 보면 그 마지막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여섯 명을 끔찍하게 죽인 죄수 고재봉이라도 그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을 친히 내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병환자처럼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그런 사람이라도, 고재봉처럼 끔찍한 과거를 가진 흉악한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그 손으로 우리를 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하고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된 구원자인 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만져 주셔서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받는 오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더러운 것을 피하는 것이 거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들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돼지나 독수리 같은 부정한 음식을 피해야 했고,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었으며, 나병환자를 가까이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와 이야기하시다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율법교사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장사꾼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되었습니다. 이 때 제사장이 거기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본척 만체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뒤로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피가 외국인들과 섞였을 뿐 아니라, 온갖 우상을 숭배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마리아인이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맹비난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당시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들도 그렇게 행동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가장 중요한 일은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불결하게 되어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1장에 보면 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부모의 시체도 만져서는 안 된다고 나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의 거룩은 철저하게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것에 오히려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드셨습니다. 지금 나병환자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서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같이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대실 때 나병환자의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거룩을 전염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부정한 것이 거룩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점에서 참된 경건은 이 세상을 멀리 떠나 있는 수도원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한 가운데 있는 교회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거룩하기 위해서 더러운 이 세상을 일단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더러운 세상을 피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더러운 세상에 친히 들어오셨고, 나병환자를 친히 손으로 만지심으로 그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을 전염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똑같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신학교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원과 수도원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곳에는 소금과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금과 빛이 필요한 곳은 죄로 썩어가고, 죽음의 어둠으로 덮여진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썩어가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로 우리를 보내시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거룩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로 썩어가는 곳에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으로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처럼 거룩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이 전염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며, 근원적인 외로움이 채워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가 병이 낫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45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에서 고침 받은 그 사람은 즉시 이 사실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파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널리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나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에게 절대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이 생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방금 읽은 말씀에 본 것처럼 예수님의 소문이 크게 나서 다시는 동네에 드러나게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계속 전하였을까요? 이것은 일부러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것은 예수님께 거룩을 전염 받은 사람의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기 걸린 사람은 그가 스스로 조심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하면 감기를 전염시킵니다. 예수님께 거룩을 전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거룩이 자연스럽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썩어가는 것에 그저 뿌려지기만 해도 썩지 않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깜깜한 방에 초 하나가 켜지면 자연스럽게 어둠이 물러가게 됩니다. 예수님께 거룩을 전염 받은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그 곳에서 거룩을 전염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라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내용을 달달 외우거나 교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만나서 나 같은 죄인도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그 사랑과 은혜가 배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나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거룩을 전염시키는 사람은 가정에서나, 교회, 직장, 어느 곳에서도 거룩을 전염시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과 화평을 심습니다. 그 성도의 말과 행동 속에 예수님의 거룩, 사랑, 화평이 스며 나와 이처럼 상황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나온 중풍병자를 예수님은 물리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그를 환영해 주시고, 또한 그를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모든 고통과 소외, 외로움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는 거룩을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을 믿고 앞으로 나오는 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또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와 소외, 외로움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은혜로 받아주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