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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7/12,주일-오후) 살전 강해(4)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 살전 2:1 ~ 4절 / 고한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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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주일-오후) 살전 강해(4)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 살전 2:1 ~ 4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405장, 452장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데살로니가 교회가 참으로 모범적인 교회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보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지 않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저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나의 것을 기꺼이 희생하며 섬기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강림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소망으로 매일의 삶을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 사랑, 소망이 충만했던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뿐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보다 전도의 열정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도시를 넘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까지 널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단지 입으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복음을 받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복음과 함께 생생하게 전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그들의 삶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전한 복음은 강력했습니다. 그 결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말 모범적인 귀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범적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실은 그 역사가 매우 짧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결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3개월 정도 만에 바울과 그 일행이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극심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설립되지 얼마되지 않은 개척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고려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생존하는 그 자체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모범적인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 그저 가볍게 듣지 않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네 가지 땅에 뿌려진 씨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길가와 돌밭, 가시밭과 좋은 땅에 각각 뿌립니다. 그런데 처음 세 땅에서는 씨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똑같이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였습니다. 새가 와서 씨를 먹었고, 돌밭이라 뿌리가 내리지 못하고, 가시떨기 때문에 자라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알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100배, 60배, 30배의 놀라운 결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 씨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뿌려지면 100배, 60배, 30배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그 예입니다. 역사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모든 것이 열악하고 부족한 교회였지만, 말씀이 좋은 마음에 떨어지자 이처럼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은곡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 교회는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어려워하고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극복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우리 교회는 얼마나 잘 갖춰진 교회인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어려운 점들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물론 잘못된 것들은 고쳐야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 좋은 땅 같은 마음을 우리가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능가하는 귀한 열매를 우리가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질을 붙드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질이 아닌 주변적인 것에만 신경쓰면 애는 많이 쓰지만 정작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청빙되어 갔습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교회 강단 옆에 피아노가 있는데, 그 위치가 너무 중앙에 있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제직들에게 피아노 위치를 한 쪽으로 이동시키자고 제안을 했답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동의하실 줄 아셨답니다. 그런데 모든 제직들이 반대를 하더랍니다. 그 피아노 위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조금 속이 상했지만, 이것 가지고 성도들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기도할 때 목사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매일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성도가 모두 돌아가면 피아노를 하루에 1Cm씩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1Cm 움직이면 표가 전혀 안 납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고작 7Cm에 불과한 것이죠. 그렇게 일 년 동안 옮겨서 결국 원하는 위치에 놓았답니다. 물론 성도들은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보면 정말 비본질적인 일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교회의 많은 힘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본질, 즉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수많은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은곡교회 모든 성도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을 경험하고, 그 결과 우리 교회가 모범적인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말씀이 역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했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어떤 마음과 태도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이 말씀은 바울과 그 일행이 처음 데살로니가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도시에 가기 전에 먼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에서 복음 때문에 엄청난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바울과 실라가 엄청난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그 일행은 온갖 핍박 가운데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고, 그 곳을 빠져 나와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도 빌립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무서운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편안하고 안정된 상황 속에서 이뤄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터와 같이 큰 위험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항상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는 대로 바울과 그 일행은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근본적인 힘,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하나님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였듯이, 모든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힘입어 주의 일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일은 돈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돈과 사람이 없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일은 하나님을 힘입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의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소아시아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울이 한 일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나라의 왕도 아니었고, 큰 군대를 거느린 지휘관도 아니었고, 많은 제자를 둔 위대한 스승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 선교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역사가는 오늘의 유럽이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이 항상 하나님을 힘입어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17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많은 사람도, 많은 물질도, 많은 권세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 곁에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언제나 하나님의 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것이 많아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편 127: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하나님을 힘입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열심을 부려도 소용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교회의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먼저 하나님의 힘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힘을 구할 때 비록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힘입어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즉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의식한 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전한 것은 그 스스로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위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복음을 전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 일행은 복음을 전할 때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속임수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방법들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꾀일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꾀이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인정받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로 헌금하도록 독려하여 금전적인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 만족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거기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면 어떤 사람이 상처 받겠지, 어떤 사람이 싫어하겠지 하며 말씀을 가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탁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은 설교 중에 죄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 대신 “연약함”, “부족함”으로 대신 바꾸어서 말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죄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죠. 그러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에 속하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도 가능하면 성도들이 기분 나빠할 말씀은 전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목사님들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얼마나 다른 줄 아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가 왜 이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말씀이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말씀은 모두 빼버리고,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서 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로 망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까지 “너희는 괜찮다”고 설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을 흘리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가감 없이 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던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행한 백성들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한 멸망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죄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어떨 때는 무섭게 꾸짖고, 어떨 때는 타일렀습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씀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결국 망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그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계속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사람은 결코 목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은곡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하게 하고, 그래서 살리는 그런 말씀이 선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저를 포함한 우리 교역자들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만을 전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꼭 성도님들이 해야 할 중요한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에 즐거운 말씀, 편안한 말씀만을 들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게 하시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늘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 능력을 우리 삶 가운데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 모두가 마음에 잘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은곡교회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힘입어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셔서 힘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이든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은곡교회 강단에서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씀만 선포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가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설교를 듣는 우리 모두가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