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712_교회기초다치기(5)_구원_(눅15장11-24)-고한율목사.pdf
(7/12,주일-오전) 교회 기초 다지기(5) : 구원 / 누가복음 15장 11 ~ 24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15장, 254장, 527장, 53장
[ 누가복음 15: 11~24 ]
오늘은 교회 기초 다지기 다섯 번째 시간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교회 기초 다지기라는 주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알아야 할 주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원 또한 지금까지 살펴본 주제와 같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보면 오늘 다루는 ‘구원’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주제들, 즉 성경,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우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오직 구원 받은 성도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고 1년 동안 독일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녔는데, 그 때 독일어 선생님이 하신 말 중에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사회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인데, 자신은 자기 나라, 즉 독일에 거지가 왜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지 정책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거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직업을 잃으면 정부에서 직업을 구할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도록 월급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거처를 마련해 준다고 합니다. 적어도 정부가 의식주 문제는 해결해 주기 때문에 거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참 부러웠습니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매달 비싼 집세를 내야하고, 항상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했던 저에게 독일의 복지는 정말 꿈같은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독일의 복지가 아무리 좋아도,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독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여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라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는 사람들이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는 하루 중 가장 더운 때인 정오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곁에 혼자 앉아 계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는데,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이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타락한 백성이라고 유대인들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 때 놀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목이 말라서 여인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요한복음 4:15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은 이 샘물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진짜 마시는 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샘물을 주셔서 더 이상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주겠다는 것인데, 여인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진짜 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이렇게 생각한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매우 불행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5번의 결혼을 했고, 또 실패하여 지금은 남자와 동거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 간에 이러한 과거는 여인에게 족쇄가 되어 늘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이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정오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물가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가장 필요한 구원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마실 물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장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진짜 마시는 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이해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당장 필요한 것, 우리의 몸이 병들었다면 병으로부터 치료받는 것,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에 있다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는 것, 인간관계가 깨어졌다면 다시 화목하게 되는 것, 우리는 이것을 구원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러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한 구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전부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여인이 우물가에 다시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영원한 샘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본적인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당장의 어려움을 넘길 수 있는 그런 임기웅변식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바꾸는 영원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단지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여인의 지난 수치스럽고 불행한 과거로부터 근본적으로 건져내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즉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단지 현재의 시련과 어려움에서 건져내는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아주 작은 열매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종살이하면서 월급을 받지 못했는데, 연봉협상을 해서 충분한 대우를 받도록 했습니까? 사는 집이 허름하니까 좋고 쾌적한 아파트를 분양받도록 했습니까? 이전까지 휴가가 없었는데, 한 달은 쉴 수 있도록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서 꺼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애굽 안에서 산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꺼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이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고, 좋은 환경에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애굽 안에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 안에서 산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지 우리가 지금 당하는 시련과 어려움에서 건져 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진짜 문제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진짜 문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문제야 말로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일으키기는 진짜 문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구원에 대해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구원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죄를 처음 지은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와서 유혹을 합니다. 창세기 3:1절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고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모든 열매는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뱀이 뭐라고 즉각 대꾸합니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 아래에서 살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 아래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뱀의 말은 선악과를 너희가 먹을 때 너희가 진정한 자유, 독립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뱀의 유혹에 빠져서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의 말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인간은 뿌리가 땅에서 뽑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나무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물속이 답답하다 하여 물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창조주를 떠난 인간이 꼭 그와 같습니다. 나무가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이 답답하다고 하여 땅에서 뿌리를 뽑아냅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뿌리가 땅에서 뽑힌 나무는 결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합니다.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저는 절대로 새벽에 일어날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호흡을 주셨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날 때마다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 이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결과로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음 아래서 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때부터 죽음의 영향력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증상들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떻게 감기에 걸린 줄을 압니까?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압니다. 머리에 열이 나고, 콧물이 나고, 기침이 심해지고, 목이 따끔따끔합니다. 이런 증상이 있으면 감기가 걸린 줄 압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아래서 살게 되었는데, 죽음의 증상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슬픔과 아픔, 시련과 고통, 악들이 모두 죽음의 증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런 죽음의 증상 하나 하나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탕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자신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대로 유산을 나눠주게 됩니다. 이 때 둘째 아들은 받은 전 재산을 가지고 해외로 갑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흥청망청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곧 둘째 아들은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돈이 다 떨어졌을 때 머물던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찾다가 얻은 일이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치욕적인 일입니다. 율법에서 돼지는 매우 불결한 동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절대로 돼지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를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얼마나 궁핍한 상황에 놓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서, 엄청난 후회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왜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해서 이런 처지에 있게 되었는지를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뵐 면목은 없으니 아들로서가 아니라, 그 집의 종으로 받아달라고 하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집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 멀리 자신의 집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향해 뛰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 뛰어오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둘째 아들은 알게 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저 멀리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자 마자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놀란 둘째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아들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뒤따라온 종들을 시켜서 제일 좋은 옷을 아들에게 입히고, 이 사람이 내 아들이라는 증표인 반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집에 가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이미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눈치가 빠르신 분들 중에는 “아하 이 비유는 바로 이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탕자 이야기는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탕자 이야기로 각색을 한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탕자, 둘째 아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외국으로 간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면 탕자가 외국에서 완전히 거지가 된 것은 무엇과 같은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죄를 지은 이후에 죽음 아래서 살게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탕자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탕자 이야기에는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음 아래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하면 죽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탕자 이야기에는 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탕자는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바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땅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를 다시 땅에 심는 것, 물을 떠난 물고기를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어떤 문제든지 절 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단지 드러나는 증상만 해결한다고 감기가 낫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감기 바이러스를 죽여야지만 나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함 없이 우리가 가진 문제들은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방법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주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문제들은 하나씩 해결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죄의 문제로 씨름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세요. 삶의 시련과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세상 다른 곳에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나태해 지고, 이 세상을 더 사랑하시게 된 성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이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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